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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타는 성벽보수공사를 하는 석공조합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의 수도인 델피나드에는 지난 공성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성안의 분위기는 활기로 가득찼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눈에선 조금도 공포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명색이 세 영지를 거느리는 국가인지라 일개 원정대의 공격으로는 그들의 자금력과 기사들을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거리에서 개량된 묘목과 씨앗품종을 판매하는 씨앗상회 조합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적대세력으로부터 성벽의 보호를 받으면서 조합의 공용생산시설을 통해 그들의 상품을 생산한다.
원대륙에는 씨앗상인이나 묘목상인을 찾아보기 어려운데다 그들의 개량품종들은 가격 대비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물건은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물론 아무나 수도에 조합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상업행위를 하려면
우선 같은 국가 소속의 시민이어야 하고 높은 세금을 지불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수완이 좋아 국가의 행정관료들로부터 승인
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정관료는 이곳의 영주가 지휘하는 원정대 소속의 사람들이 주로 차지하는 직업이다.
그들은 공성전에 참여하는 기사계급이면서도 때에 따라 행정관료 직위를 겸하기도 한다.

성문이 열리면서 그 주변에서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기적으로 서대륙으로부터
원자재와 귀금속이 운반되는 날이다. 마차 주위로 용병들이 줄을 서서 호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본토로부터 직접 물자가 운송되어야 한다. 마리아노플, 이즈나, 초승달 왕좌로부터 매주
물자가 선박을 통해 고요한 바다를 지나며 원대륙에 도착한 물자는 육상경로를 통해 수도로 이동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 조합에서 숙련된 항해사와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이제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본토로부터 공급되는 원자래와 귀금속들은 수공업자 조합들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공용작업장을 통해
유일등급 이상의 무기를 제작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모두 원대륙에 존재하는 희귀한 광석과 금속물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본토에도 수공업자 조합은 존재하지만 그들이 원대륙의 조합원들보다 양질의 무기를 제작하는 데는
재료와 기술상의 한계가 있다. 본토와 생산환경이 동일하다면 그 누가 원대륙에 와서 비싼 세금을 내가며 무기와 방어구
를 생산하겠는가?

다양한 조합을 통해 생산된 물품은 원대륙 내에서 교역의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각 지역마다 특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교역품이 존재하며 이들은 국가간의 무역에 이용된다. 그렇기에 국가간의 무역은 동대륙이나 서대륙에서의 무역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들의 무역은 국가로서 누리는 상당한 이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가의 자금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상대 국가가 우리와 전쟁상태에 있다면 무역은 할 수 없게 된다. 그 경우에는
동대륙이나 서대륙에 있는 큰 도시들을 상대로 거래를 해야 한다.

이렇게 강력한 이권을 지니고 있다보니 부정부패나 첩자 문제가 언제나 발생한다. 국가에는 독립적인 법원과 감옥이
존재하므로 이를 통해 행정기관과 범죄자들을 제재할 수 있다. 법원은 영주가 지휘하는 원정대 뿐만 아니라 시민이라면
모두가 참여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원대륙의 국가는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축제를 열어
불꽃놀이를 하기도 하고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술로 밤을 달랜다. 호전적인 일부 기사계급은 콜로세움에서 마상대회를
열어 그들의 용맹함을 뽐내기도 한다. 그들의 문화는 그들 스스로가 수호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존경을 표할 만하다.

사실 오늘 밤도 공성전의 수성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전우들의 혼을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모든 조합원의
활동은 행정기관의 재량권으로 축제가 열리는 밤에는 일체의 생산활동이 금지된다. 스베타는 축제가 시작되는 밤이
다가오기 전에 해안에 위치한 다른 국가에 다녀오기 위해 말에 올라탔다. 스베타는 얼마 전 그곳에 있는 무역조합으로부터
커스터마이징한 선박도면 제작을 의뢰했었다. 모든 국가에 무역조합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베타는 다른 도시의 조합
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성문을 나서면서 스베타는 웅장한 수도의 성벽들을 바라보았다. 공성병기들에 의해 파손되고 검게 그을린 부분이 채 보수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스베타는 그런 모습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성벽 너머의 수호탑을 넘
보지 못할 것이다. 수호탑에 도착하려면 수많은 조합과 농장, 그리고 방어시설물을 통과해야 한다. 그들이 힘들게 이룩한 것들
을 손쉽게 내줄만큼 시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베타는 고삐를 당기며 황폐한 대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오늘
축제에 늦지 않고 도착하리라.

스베타 @키프로사 님이 작성한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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