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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용사가 무슨 바느질이야?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마지막 바느질을 끝낸 날 바라보던 동료가 물었다. 대답 대신 눈을 감고, 나는 그곳을 떠올렸다.

눈을 감자 떠오르는 아련한 공간의 기억이 그곳으로 바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촌장님은 별일 없으실까? 그 소녀는 이 인형을 마음에 들어 할까?

새로운 문명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된 모든 것의 시작, 그곳으로 나는 오늘 돌아간다.
동료에게 손 인사를 건네고, 이지의 아들에 올라탔다.

"자, 이제 가보자!"


크라켄을 품고 있는 바다라고는 도저히 떠올리기 힘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잔잔한 바다를 가르는 길동무에게 몸을 맡긴 채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난히도 고운 손을 가졌던 외소한 몸집을 가진 사내의 어린 시절, 사내는 작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동네 악동들의 좋은 놀림감 이였다. 그리고 그 시절의 소녀는 언제나 악당들로부터 사내를 구해주던 그의 작은 영웅이였다.
항상 용맹하던 그 소녀에게도 무서운 일은 있었다. 제 아비를 닮아 나무 깎는 일을 좋아하던 소녀는 그런 투박함 때문에 언제나 제 어미로부터 핀잔을 듣곤했는데, 조금은 여자애다운 일을 하라며 제 어미가 항상 쥐어주던 봉제인형 만드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하였다. 나무를 깎을 때면 그토록 예리했던 소녀의 손마디는 바늘을 쥐어 줄때면 언제나 무뎌지고말아, 오히려 가끔 그녀를 대신해 주던 소년의 바느질 솜씨가 어느덧 제법이게 되었다.

“우와~잘만들었다! 있잖아, 우리 나중에 커서 함께 장난감 가게를 하면 되겠다. 그치? 나는 나무를 깎아 목마를 만들고, 너는 천을 기워 어여쁜 인형을 만드는거야. 카어노드르에 동대륙 제일의 장난감 가게를 여는거지!”

이따금 밤새워 투박한 솜씨로 내놓는 소년의 인형을 볼 때마다 소녀는 그렇게 미래를 그려내곤 하였다. 소년은 그 웃음이 좋아 밤새워 바느질을 해 소녀의 앞에 인형을 내어놓곤 하였다. 소녀의 앞에서는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뾰루퉁하게 투털거리긴 했지만, 소년은 소녀가 그려주는 미래가 좋았다. 그런 평온한 일상을 소년은 사랑했다.

하지만 이윽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소녀는 처녀가 되어가며 그렇게 서로에게 차츰 무심해져 갔다.

어린 시절 소녀 앞에서 당하던 창피가 부끄러워 배우던 검술이 소년에게는 맞았던 것인지, 이제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되어 장차 큰 도시에 나가 기사가 될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촉망을 받게 된 소년은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오겠다며 그 옛날 최초의 원정대가 출발했다던 원대륙의 땅을 찾아 나섰다. 거대한 도서관이 있다는 빛나는 해안을 넘어서까지 보고 오겠다는 포부를 꿈꾸며 사내는 마을을 나섣다.

그렇게 꿈을 꾸던 어느 날, 수행자 마을에서 온 편지라며 전해 받은 편지에는 마을의 근황과, 소녀의 소식이 적혀있었다.
고대의 숲에 목재를 구하러갔던 소녀의 부모가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안탈론과 피투성이 군대를 만나 참변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편지를 받자마자 정신히 아득해져, 소년은 그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소녀를 찾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소년이 알던 그 옛날의 소녀가 아니였다. 그리고 그 길로 소년, 아니 사내는 길을 나섣다.

그렇게 마을을 나선지 10여년이 더 지나고.. 수십, 수백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쯤이 되자 사내의 주위에 목적을 공유할 동지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이들이 노래하는 어린시절의 풍경을 들을 때마다 사무치도록 고향이 그리워져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때면 사내는 언제나 모닥불 앞에 앉아 작은 인형을 만들곤 했다. 그의 동료들은 이제는 덥수룩해진 사내의 바느질을 가지고 놀리기도 했지만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사내는 더 이상 누군가의 놀림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바느질 한 곳을 풀고 기우기를 수차례, 이제는 손때가 묻어 더이상 새 인형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몰골이 되었지만 사내는 항상 그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수년을 대륙 전역에서 출몰하곤 한다는 안탈론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안탈론 슬레이어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사내는 작은 인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오랜 회상을 마친 사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말이야..”

많은 것을 이룬 사내의 옆에는 역시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돌아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는 그 시골로 돌아가서 뭐하겠냐고, 그냥 이곳에 있으라며 사내를 만류했지만 사내는 그때마다 대꾸하였다.
“돌아갈 거야. 가서 인형을 만들려고, 아주 많이..”
사내의 엉뚱한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말을 내뱉는 사내의 눈빛을 보고 나서는 더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바다를 달려왔을까, 어느새 항구 특유의 비릿한 내음이 사내의 코끝을 찔렀다. 그의 길동무가 길게 돌며 머리위로 긴 울음을 내뱉었다. 이지를 따라 출렁이는 물보라 때문에 흐린 시야 너머로 기억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이니스테르의 종탑이 그려졌다.

기분탓이였을까. 배낭 안쪽에 있는 인형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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