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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의 이야기 사흘 전의 이야기

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왕자비로 내정되었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솔즈리드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저…혹시 그 귀걸이, 방금 여기서 주우신 거 아닌가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누이안치고는 체구가 작은, 검은 드레스를 갖추어 입고 베일 장식을 써서 얼굴을 살짝 가린 갈색 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20세 전후…아니, 조금 더 어려 보였다. 귀걸이의 원래 주인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옆머리를 뒤로 땋아 리본처럼 묶어 내렸기에 드러난 그의 귀가 보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었거니와, 평소에도 귀걸이를 하지 않는 듯, 구멍을 뚫은 흔적도 없었다. 소녀는 모처럼의 횡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충동에서 거짓말을 했다.

“아뇨, 이건 제 거예요. 어제 이 근처에서 잃어버렸거든요.”

막상 거짓말을 하고 보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한 마디를 덧붙이는 소녀의 모습은 사실 누가 봐도 어색한 것이었다. 귀걸이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소녀의 옷차림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귀걸이를 빼앗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소녀는 귀걸이를 귓볼에 가져다 댔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화급히 손을 들어올리며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소녀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귀걸이를 걸어 버렸다. 그 순간,

“마리아…….”

속삭임이 울렸다. 들린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울렸다. 비록 속삭임이었지만 머리를 때리듯 강한 소리였기에, 소녀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울리는 음산한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나의 마리아…나는 슬프단다…아아, 마리아…….”

소녀는 그제야 이것이 망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포가 온몸을 잠식하는 그 순간은, 아마 평생을 살면서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때,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굳히던 공포가 걷혔다. 소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땅바닥에 부딪히는 감각마저도 삶의 기쁨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무엇을 들었죠?”

언제 벗겨냈는지, 하얀 레이스 장식의 손수건으로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들고, 검은 드레스의 여성이 물었다. 소녀는 아까까지의 거짓말도 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리, 아라는 이름, 과, 스, 슬프다, 는 이이야기…주, 죽은 사, 람의 목소리, 가 드드들렸…….”
“…역시나…….”
“그그그, 게 뭐, 죠? 아아아…….”
“일단 진정하세요. 자, 이 물약을 마시면 좀 괜찮아질 겁니다.”

여성은 소녀의 떨리는 손을 붙잡고 물약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왔다. 묘하게 시원한 그 맛에 다시 한 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소녀는 그저 눈물 흘릴 뿐이었다. 여성은 소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까요…일단 제 이름은 엘리자베트라고 해요. 이 귀걸이를 찾아 하슬라로부터 산과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이름은 누이안식이지만…보시다시피 혼혈이죠.”

베일 장식을 들어올리며 엘리자베트는 이야기했다. 그저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이목구비가 작고 오밀조밀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누이안이나 엘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 카페에서는 백 년 정도 전에, 한 여성이 목졸려 죽었어요. 왕자비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결혼을 앞두고 소재가 불분명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흠 잡히고 있었죠.”
“그 사람이 마리아…인가요?”

엘리자베트는 소녀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마리아는 제 증조 할머니의 이름이에요. 이곳에서 죽은 여성의 이름은 노아였답니다. 두 사람은 쌍둥이 자매였어요. 아주 사이가 좋은…….”
“하지만…그 소리는 마리아를…….”
“…노아 할머니는 사실 목 졸려 죽기 몇일 전부터 정신적으로 무너져 계셨다고 해요. 마리아 할머니를 부르고 계셨다면,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셨다는 게 되는군요.”
“사실?”

소녀는 의문했다. 물약 덕분인지, 이제는 떨림이 멎고 호기심이 들었다. 정말 살아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는 거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네, 그게 바로 제가 여기에 와서 노아 할머니의 귀걸이를 찾고 있던 이유죠. 저는 마리아 할머니의 일기장을 우연히 발견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엘리자베트가 슬픔 섞인 탄식을 내뱉았다.

“노아 할머니는 실제로 식을 올리기 전에 사흘간 하얀 숲에 계셨어요. 마리아 할머니가 하얀 숲에 가 계시다고 믿으셨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 할머니의 거짓말이었죠.”
“네?”
“마리아 할머니는 노아 할머니를 존경하고 계셨어요. 때문에 여성 편력이 화려한 왕자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요. 그건 차마 말로는 옮길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노아 할머니가 마리아노플에 계셔서는 안 되었기에 꾸민 일이었다고 해요. 결과적으로 왕자비 내정은 취소되었지만, 노아 할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적혀 있습니다…그래요.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큰 충격을…….”
“말로는 옮길 수 없다는 건…….”
“당신은 아직 이런 잔혹한 이야기를 듣기에 어리지 않을까 해요.”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일어섰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는 걸 깨달았다. 부끄러움이 몰려온다는 것도 살아 있다는 증거, 라고 생각하니 그저 마음이 편안해졌다.

“당신에게 먹인 물약은 동대륙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물약입니다. 아마 2~3일 정도는 효과가 지속될 거예요. 그 동안 마음을 추스려 두세요. 두 분의 이야기는 아마 그 즈음해서 모든 마리아노플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가 될 테니.”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자베트는 품 속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 일기장에 적힌 것들을 저 스스로 확인할 겁니다. 바로 이 귀걸이를 통해서…노아 할머니의 혼령은 아직 여기에 묶여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노아 할머니를 편히 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진짜 범인을 찾아낼 거예요. 범인은 아마도…아니, 섣부른 이야기는 할 수가 없겠군요. 어쨌든 모든 것이 끝나면, 일기장을 제가 아는 명인 인쇄업자에게 맡길 생각이에요. 그가 퍼뜨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없다고들 하니까.”

엘리자베트는 그렇게만 말하고, 약병을 하나 꺼내어 깨뜨렸다. 순식간의 그 모습은 그림자처럼 사라졌고, 소녀는 약에 취해 그저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마리아노플은 백 년 전 사건의 범인 이야기로 발칵 뒤집히게 된다. 왕실의 체면은 있는 대로 구겨져 걸레짝 같은 취급을 받게 되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부가설명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것은 제가 집필하고 있는 시리즈 소설 <허구의 이야기>에 나오는 두 인물, <노아(音愛)>와 <마리아(聖愛)>라는 쌍둥이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전제로 깔고 엘리자베트라는 백 년 뒤의 인물을 설정하여 아키에이지 세계에서 써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이 단편에 그 단편만이 소개되어 있는 노아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허구의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극단적인 사건들을 아키에이지에 맞추어 조금 손만 본 것으로, 원래는 범인이 따로 없는 것인데 이번 엘리자베트 이야기를 끄적이면서 마리아노플 배경이면 역시 범인이 있는 편이 좋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약간 각색을 해본 것으로, 본편과는 아마도 하등의 흡사함이 없을 새로운 이야기로 변했습니다.

'말로는 옮길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건 그만큼 잔혹한 일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 굳이 옮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걸 다 쓰고 보니 전민희 작가님의 도입부를 포함해서 2,600자 정도였거든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진실편을 쓸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는 역시 여운이 남도록 끝까지 숨겨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음, 어쩔까요...ㅎㅎㅎ

이번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해 세 가지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걸로 두 개를 옮겼습니다. 다만 이 글까지의 두 편에 세 번째 이야기가 섞여들어가버렸기 때문에 이걸로 이벤트 참가는 끝나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사흘 정도 남은 이 이벤트, 모쪼록 많은 분들이 건필하여 주셔서 재미나게 끝나기를 기원합니다.


아, 참고로 소녀에게 먹인 물약은 그 유명한 '우황청심원'입니다.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인데놀정 10mg와 효능이 같은 것처럼 나오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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