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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통념처럼 죽은 자들은 천국에 가지 않아. 세상 어디엔가 다시 머물 곳을 찾지”
몇 년 전 하슬라 베로에에 갈 일이 있어서 잠시, 로카의 장기말들의 물안개 마을이란 곳을 지날 때의 일이다.
로카의 장기말들에는 봉우리가 많고, 사이로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 잘 곳을 정하기 쉽지 않다.
봉우리 밑 그나마 바람이 잘 불지 않는 곳을 찾아 모닥불을 피고, 아까 물안개 마을을 지나오면서 얻어온 결혼식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운이 좋았어. 마침 결혼식이 열려서… 여기 결혼식은 참 신기했어. 좀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드문드문 무역상들이 지나가는데 하나같이 나를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좀 이상하다 싶어서 한 무역상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오? 내가 무섭소?”
“당신이 뭐가 무섭겠소? 여기가 무섭지. 여긴 죽은 자들이 찾는 곳이오. 몰랐소?”
“근처에 물안개 마을로 가시오. 여기 있으면 큰일 나요”
“죽은 자? 귀신 말이오? 에이, 귀신이 어딨어… 놀리지 마시오”
다시 물안개 마을로 가라고? 거기서 반나절이나 내려왔는데… 귀신이 어딨어? 그리고 내가 귀신에 죽을 사람인가?
나는 무시하고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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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후……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깨웠다.

“…이, 어…! 어이, 친구!”

처음엔 누가 볼을 가볍게 툭툭 치는 정도였다. 나는 그저 졸려 파리나 쫓듯 휘휘 손을 저어 쫓아내려 했지만,

“일어나보라고, 이 친구야!”

라고 누군가 소리치며 뺨을 거침없이 후려 갈겼다.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하하하하! 이 친구 이거 얼빠진 얼굴 좀 보세!”

일어나 보니 눈앞에는 아까 깔아둔 잠자리는 온데간데없고,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온 몸이 반투명한 이들이,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딱 봐도 유령 꼴이었다.

“요거, 요거, 안 투명한 거 보니 딱 신입놈이구만? 그래 어떻게 죽었는지 얘기나 함 해봐, 친구! 여 들어줄 놈 천지빼깔이니까 말이야!”

앞에 선 유령 놈이 그렇게 외치니, 또 사람들이 요란하게 웃으며 “암, 그럼!”, “빨리 해봐, 이 친구야!” 같은 맞장구를 쳤다.

“주, 죽긴 누가 죽어! 헛소리들 말고 빨리 제 갈 길이나 가시오!”

내가 뭐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내게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뭔가 수군거렸다. 그러다 이내 한 명이 풉풉 거리더니 모두 폭소하기 시작, 참 뻘쭘한 상황이었다.

“아, 그럼, 그럼! 그렇고, 말고!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말투가 딱 봐도 호구취급, 안 믿어 준다는 게 눈에 확 보였다.

“아, 이 친구 보게! 아직도 촌스럽게 발이 붙어 있잖아? 하하하!”

발이 붙어 있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이 온갖 잡것들이 자세히 보니 모두 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이젠 딱 세간의 사람들이 말하는 유령 꼴이었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날 곰처럼 껴안아 왔다. 그 팔을 보니 털 복숭이. 딱 봐도 거대한 페레 놈의 팔이었다. 그리고 앞에선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달려들어 내 발목을 붙잡기 시작했다.

“여기 가위! 아니지, 아니지! 작두 하나 가져와!”

이 자식들이! 작두라는 말에 뭘 할지 눈치 채버렸다.

“놔! 놔라, 이것들아!”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지만, 페레 놈은 어림도 없고, 앞에 구경난 놈들은 아무리 맞아도 포기할 기미가 없었다.

“정든 발에 인사는 해야지?”

이 무슨 헛소리인지! 그러나 이미 두 발목이 거대한 작두 아가리 속이었다.

“그만! 그만 해! 발도 없이 어떻게 걸어 다니라고!”

그 말에 모두 더욱 크게 웃어재꼈다.

“아, 촌스러운 이승 놈 보게! 발 따위가 있으니까 땅이나 기어 다니는 거라고!”

라고 말하며 댕겅!
발목이 잘려버렸다.

“우, 우왓!”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지만, 너무 놀라 소스라칠 수밖에. 유령 놈들은 남 발목 잘라놓고 어찌나 즐거운지, 모두 폭소하고 있었다.

그때 내 정면 먼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터진 불꽃은 마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모양으로 퍼지고 있었다. 끝인가 싶었는데, 다시 먼 하늘에서 어떤 쪼그마한 유령 놈이 뭔가 들고 하늘에 오르더니 또 불꽃이 터졌다.

“아! 불꽃놀이! 왜 갑자기 시작되는 거야!”

뭔가 특이한 방식이지만, 불꽃놀이라는 모양이다. 유령 놈들의 관심이 내게서 순식간에 떠나버렸다.

“여기서는 잘 안 보이는구먼! 가까이서 봐야 돼!”

그리고 순식간에 모두 떠나 버렸다. 나는 아연해져 내 발목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게 웬걸. 발목 단면이 무슨 밀랍인형 잘라낸 것처럼 그냥 살색. 정말 유령이라도 된 걸까?

“아끼는 구두였는데…….”

문뜩 신고 나왔던 구두가 떠올라 바닥을 굴러다니는 발을 보았다.

“뭘 멍하니 앉아있어, 멍청한 놈아!”

누군가의 목소리 들려왔다. 왠지 익숙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진즉에 장사 지냈던 친구 놈이 서있더라.

“어, 어라? 네가 왜 여기 있냐?”

“멍청한 놈이…… 내가 묻고 싶다! 왜 여깄냐?! 오래오래 똥칠하고 살 것이지, 왜 죽어가지고 오르베른에 와!”

오르베른?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인데.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주변에 눈이 갔다. 하늘에 떠다니는 땅덩이, 때론 건물만 둥둥 떠다니기도 하며, 깡마른 나무며 까마귀며, 하늘에 뜬 둥근 보름달을 살짝 가리는 시커먼 구름, 박쥐까지 종종 날아다니니, 마치 애기들 좋아라하는 괴담 속 마을이었다.

“친구라는 놈이 말꼬라지 하고는! 죽기는 누가 죽어 이 친구야!”

일단 그렇게 반박하였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생각해도 죽은 기억이 없는걸!

“그럼 안 죽었단 말이냐?”

“당연하지!”

“허허, 이놈 참, 지 죽은지도 모르고……. 아니 잠깐. 너 설마 물안개 마을 밖에서 술 마시고 잤냐?”

친구 놈 하는 소리가 좀 예사롭지 않다. 그도 그럴 게, 실은 마을의 결혼식장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는 (친구 놈 말을 들어보니 아마 내가 술을 챙기는 걸 보고) 절대로 해가 지고 밖에서 자면 안 된다고 하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나는 멍청하게 저녁거리로 술까지 한 잔 하고 잠에 빠진 것이다.

“어, 어떻게 알았냐?”

“하! 이 바보 놈! 빨리 따라 와!”

“발도 없는데 어떻게?”

나는 발이 떨어져나간 두 다리를 휘적휘적 허공에 저으며 말했다.

“이승에서 배워먹은 헛소리 하지 말고 날아와! 발 같은 게 있으니까 땅바닥이나 붙어 다니는 거라고!”

그 말을 들어보니 뭔가 새로운 감각에 눈뜨는 기분, 발이 없어 걸을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유령처럼 날아다닐 수 있었다.
친구 놈을 따라가니 둥둥 떠다니는 집 중 하나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마법사 복장을 한 반투명한 엘프 여자가 앉아있었다. 여자 앞 테이블에는 머리만한 보따리들이 여러 개 있는데 뭐 해먹는 물건인지 알 도리가 없더라.

“인사해라! 이 마을 불꽃 장인이시다!”

고개를 까딱여 인사. 엘프는 날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이 사람, 살아있군요?”

“그렇지. ‘11월의 밤’에 술 마시고 물안개 마을 밖에서 자는 놈이 있을 줄이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어딘가의 금기인 모양이다.

“안 돼?”

“당연하지! ‘11월의 밤’이라 불리는 오늘은 오르베른의 문이 열리는 유일한 날! 그런 날 술 같은 걸 쳐 마시고 물안개 마을 밖에서 잤다간 영혼만 빠져나와 네 꼴이 나는 거다!”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태평한 소리나 해댔다.

“그럼 돌아가야 하나?”

잠자코 있던 엘프가 입을 열었다.

“당연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1년 중 유일하게 문이 열리는 날. 만약 오늘은 놓치면 1년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끔찍한 소리로군.

“이런 곳에서 1년이나 있고 싶지 않은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 몸도 1년이나 안 기다려 준다, 이놈아!”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생각해보니 영혼 빠진 내 몸이 주인 없이 1년 동안 버틸 리가 없었다.

“즉, 오늘을 놓치시면 당신은 여기서 평생 살게 되는 겁니다.”

“이런! 그럼 지금 당장 떠나야겠네?”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자, 잠깐!”, “기다려요!”

두 사람이 헐레벌떡 일어나 날 붙잡았다. 왠지 불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네?

“뭐, 뭐야! 이승에 미련이라도 있어?”

“조급해하지마! 원래 죽은 놈은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처럼 반투명해 지는 거라고! 근데 넌 멀쩡하잖아?”

그런 건가? 뭐, 틀린 말 하는 건 아니겠지?

“음…… 그래서?”

“지금 대책 없이 나간다면 당신을 시샘한 유령들이 당신을 못 가게 막아설 겁니다.”

생판 남인 엘프도 날 막아서며 이유를 설명해줬다. 이걸 믿어야 하나……?

“시샘? 왜?”

“발이 없는 당신이 날아다니는 자유를 느끼는 것처럼, 몸이 없는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처음엔 자유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밟았던 땅이 그리워지고, 묶여있던 세상에 그리움을 느끼는 겁니다.”

이유를 들으면 들을수록 불신감이 피어오르는데, 어째…….

“그래서 막고 있는 거야?”

내 말에 두 사람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바보 놈이! 도와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필사적인 친구 놈의 태도에, 불신감은 좀 남았지만, 그래도 좀 들어줘야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그래서? 어떻게 도와줄 건데?”

“우선 그녀의 마법으로 만든 이 불꽃놀이로 한 번 더 시선을 분산시킬 거야.”

“헤에……. 그나저나 유령이 마법 같은 거 쓸 수 있는 거야?”

보통 귀신이니 유령이니 하는 건, 결국 죽어라고 저주하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귀신 따위가 날 죽일 수 없다고 여겼었다.

“여기는 오르베른입니다. 세상에 없는 곳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오르베른에도 세상이 없습니다.”

뭔 소린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대로 물었다.

“뭔 소리래?”

친구 놈도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자기 식대로 말했다.

“여기선 세상의 상식이 안 통한다는 거지.”

“호오? 무튼 그래서?”

“그래서라니? 계획도 설명도 끝이야. 나머지는 네가 잘 가야지.”

그렇게 막아서니까 뭔가 더 완벽한 계획이 있는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이승 가는 길이 어디야?

“가라니…… 어디로?”

“이승으로, 멍청한 놈아!”

“그러니까 어디로 가야 이승인데! 욕만 하지 말고 가르쳐 줘봐!”

“산 놈이 알지 죽은 놈이 알겠냐?! 짐작도 안 가면 왔던 곳으로 가보던가!”

그것도 그렇네? 화가 나서 버럭 지른 말이었는데, 돌아온 말이 너무 이치에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엘프 꼬맹이들이 들어왔다.

“스승님, 스승님! 불꽃 전부 터트리고 왔어요!”

나는 잔뜩 쫄아 순식간에 친구 놈 뒤로 숨었다. 반투명한 친구 놈 뒤로. 친구 놈은 한심한 놈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한 번 더 부탁하마.”

엘프 여성은 보따리들을 꼬맹이들에게 넘겨주었다. 호오, 저거 불꽃이었구나? 꼬맹이들은 불꽃놀이 보따리에 정신이 팔려서 날 신경 못 쓰는 모양이다.

“와아~.”

그리고 나가버렸다.

“뭘 구경하고 자빠졌어! 빨리 가! 불꽃 터진다잖아!”

“아, 그, 그렇지!”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인사를 하고 빨리 왔던 곳으로 날아갔다.
펑! 펑펑!
뒤에서 터지는 불꽃소리, 사방이 환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화려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예쁘네.”

같은 태평한 감상이나 하고 있더니, 이게 웬걸.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불꽃 구경을 가지 않은 유령들이 꽤 모여 날 쫓아오고 있었다.

“언제 쫓아왔데, 징한 놈들이!”

“서라!” “멈춰라!” 같은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미쳤다고 멈추겠냐?
처음 있던 곳을 보니, 허공에 빛을 뿜는 균열이 생겨있었다. 글쎄, 딱 봐도 저기인 것 같은데.

“어이, 친구!”

익숙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친구 놈이 쫓아오고 있었다. 역시 이놈이 이승에 미련이 있나? 라고 생각했더니,

“멋진 구두잖아?”

라고 말하며 내 발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나 주게?”

“하핫! 그래, 옜다, 네 발!”

던져주는 발을 받아 두 발목에 붙이고 뛰어서 균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뒤에서 마지막으로 들리는 친구 놈의 말은……

“네놈 면상 꼴도 보기 싫으니까 천천히 놀다 와라, 썩을 놈아!”


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니 연하게 퍼진 안개 사이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평소라면 개꿈이라고 여겼겠지만, 왠지 너무 현실감 넘쳐서 정말 있던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나 발목을 바라보았다.

“하핫.”

정말, 발목 밑에 발이 붙어있다는 것에 피식 웃어버리게 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역시 멋진 구두라니까.”


여기까지가 몇 년 전 이야기, 내 나름 이름 붙이자면, ‘11월 밤의 이야기’. 다시 한 번 오르베른에 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살아서 유령 마을을 두 번이나 갔다 올 용기는 들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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