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네비게이션

전체글

꽃을 좋아하는 한 다루족이 있었다.
그는 올챙이 시절부터 이상하리만큼 꽃을 좋아했다.
다른 다루들이 비행선에 관심을 보일 때, 그는 하늬 마루에서 자라는 모든 꽃을 찾아 도감을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의 꿈은 세상 모든 꽃을 찾아 이름을 지어주고 도감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다루는 하늬 마루 밖으로 나가 대외 업무를 하라고 임명받았다.
하늬 마루 밖의 꽃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루는 체온 조절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들떠 있었다.
드디어 그에게 하늬 마루 밖을 나가는 날의 아침이 찾아왔다.


동그랗고 툭 튀어나온 눈을 도륵도륵 굴리며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한 입으로 연신 ~루루를 부르짖는 다루족을 서로 구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죄다 그 넘이 그 넘같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어제 창고지기 다루족에게 부탁받은 일을 생각하며 새삼 얼굴을 찡그렸다.

젠장... 그런 부탁 따위 단번에 거절했어야 했는데...
창고지기로 새로 부임한지 1주일이 넘었다 했던가... 젠장 죄다 그 넘이 그 넘 같은걸 바뀐 줄 내가 어찌 알어

사실 창고 표지알림판에 떡하니 담당 다루족의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에 눈썰미 좋은 이들은 금방 창고지기가 바뀐 줄 알았겠지만, 언제나 바쁘게 내 볼일만 보고 스쳐지나가는 나 같은 무심한 누이안이 언제 창고지기 이름 따위야 볼일이 있었어야지

그 망할 넘의 창고지기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만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까지도 결단코 창고지기 다루족 따위가 바뀐 줄도.. 이런 귀찮은 부탁으로 한숨 짖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생각지도 못했던 다루족의 귀찮은 부탁으로 나는 연신 욕짓거리를 해대며 투덜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그 다루족 창고지기는 유난히 다양한 채집물을 창고에 많이 맡기는 나를 내심 눈여겨 보았던 모양이다. 꽃을 좋아하는 다루족이라니... 내참 이 무슨 누이여신이 지나가다 옆구리 터질 웃기는 얘기란 말인가. 하긴 내가 다른 누이안보다 채집능력이 좋은거야 이웃집 못생긴 페레마저 인정하는 일이니까... 훗. 그건 그렇고

다루족이 언제부터 우리 대륙인들과 어울려 살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똑똑한데다가 특히 기계와 공학쪽으로는 대륙인들도 미처 따라가지 못할만큼 특출한 능력이 있다는 정도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묘하게 표정없는 얼굴에 징그럽게 동그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연신 ~루루를 찾는 그 넘들에게 감정이란게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던 나에게 어제의... 아니 새로온지 일주일도 넘었다던 그 창고지기 다루족의 부탁은 어느 날 아침 평생을 칼끝만 겨누던 페레족 중에서도 특히 못생긴 페레 한마리가 희죽 웃으며 오늘부터 여기에 정착하게 됐다고 인사하던 만큼이나 끔찍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하~

이윽고 길고 긴 욕짓거리 끝에 그만큼이나 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너무나 놀라서 미처 무어라 거절할 이유를 찾을 사이도 없이 그 이상한 창고지기 다루족의 부탁을 승낙해버린 나의 이 어처구니없는 멍청함에 경의를 표하며 길을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트록스크산의 차가운 눈의 꽃은 창고 깊숙한 어딘가에 고이 모셔져 있을 터... 그렇다면 문제는 로카의 축복을 받은 눈의 꽃인가 속으로 중얼중얼 되며 장비를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천년에 한번 핀다는 둥, 누이여신의 축복을 받은 이에게만 모습을 보인다는 둥 헛소문도 많은 그 꽃들이 귀하다는 것은 나같이 채집에 뛰어난 누이안이 아니라도 다 알고 있는 얘기다. 저 옆집의 못생기게 웃고 있는 페레녀석이 나한테 트록스크산의 차가운 눈의 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반응이 어땠을까? 가만... 혹시 저넘 나한테 꽃이 있는 줄 알고 이리로 이사온거 아닐까?

상상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에 지금도 날 보고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주고 있는 이웃의 페레에게 모처럼 쓱 한번 웃어주고 자리를 나섰다.

한 때는 조화와 자연을 사랑했다던 숲의 엘프마저 전쟁의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지금... 보호지역이 아니면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갑옷을 벗지 않고 손에서 칼을 놓치 않는 이 피에 굶주린 미친 세상에서...

꽃이란... 그저 진귀한 갑옷을 만들거나 장신구 따위같은 전쟁도구를 만들어 낼 수많은 재료들 중이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만큼 진귀하고 귀한 눈의 꽃으로 만든 반지는 그 파괴력과 살생력이 어마어마하여 사람들이 천금을 마다하지 않고 앞 다투어 구한다지?

사실 나는 전쟁이라던가...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 죽고 죽이고 하지 않아도 누이여신의 축복은 우리 모두가 먹고 살고 남을 만큼 땅도... 물도... 모든 것이 푸르고 풍성한데... 산과 들에는 언제나 푸르른 과실과 각종의 화초들이 넘쳐나고 물고기도, 양도, 염소도 주변에 모자름이 없건만, 많이 가진 자들과 높으신 양반들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끊임없이 강해지기를 원하니... 필경 지옥의 악마는 그런 자들의 욕심을 부치기 위해 파멸의 반지같은 악마의 산물을 만들어 낸 것이 틀림없어.

그래 파멸의 반지는 악마의 반지야... 속으로 중얼중얼 거리면서 트록스크산의 가장 높고 차가운 봉우리 위에 오롯이 피어있던 눈의 꽃을 떠올렸다.

결코 파멸의 반지 따위를 만들기 위해 산에 올랐던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진귀한 약초나 채집물을 찾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는 왠지 그냥 세상을 비웃듯 당당하게 서있는 그 산 위에 오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도 산을 따라서 이 미친듯한 세상을 맘껏 비웃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10여 차례의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애쓰던 끝에 올랐던 트록스크산의 그 장엄한 풍경과 마침 떠오르던 누이여신의 성스러운 축복 같은 빛나는 아침햇살 아래 순결한 눈의 꽃을 보면서 나는 수없는 갈등과 물음을 던졌지만... 결국 반쯤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이기적인 욕심에, 반쯤은 누군가 이 꽃으로 악마의 반지를 만드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자기변명으로 지금까지도 누구도 모르게 창고 깊숙한 곳에 눈의 꽃을 보관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낱 창고지기 다루족 따위가 눈의 꽃을 채집해달라고 요청하다니... 그것도 트록스크산의 차가운 눈의 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 머나먼 적대륙의 로카의 축복을 받은 눈의 꽃이라니...

분명 다루족은 전쟁을 모른다. 그들은 매우 똑똑하지만 무엇인가 하나에 꽂히면 가지고 있는 모든 열정을 쏟아낼 만큼 단순하고 순박한 그들이 아니 그 창고지기 다루족이 파멸의 반지따위를 만들기 위해서 눈의 꽃을 채집해달라고 했을리 만무하다.

그 다루족은 어눌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륙공용어로 분명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꽃을 이제 보았다고... 그리고 또 다른 세상에 감추어진 나머지 하나의 꽃을 보고 싶다고... 그 꽃에서 누이여신의 축복을 찾고 그것을 기록하게 해달라고...

꽃을 좋아하는 다루족이라니... 젠장....

내가 그까짓 다루족의 잡동사니 상자 몇 개에 이 귀한 트록스크산의 눈 꽃을 넘겨주는 것도 모자라서 목숨을 몇 개나 담보로 하여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로카의 눈 꽃을 구하기 위해 이 위험한 여행을 떠나야 하다니... 젠장 이런 제장 필경 내가 잠시 누이여신의 축복을 팽기치고 사악한 악마의 속삭임에 미쳐버린 걸게야.

하지만... 하지만 말야...

세상 모든 누이안들이 다 큰 칼을 어깨에 짊어지고 더 큰 명예와 더 큰 영광을 위해 평생을 핏내음속에 살아가도 가끔은 나처럼 그저 대륙인들과 어울리고 자연 속에 떠도는 걸 더 좋아하는 미친 넘도 있는데, 다루족이라고 해서 꽃을 좋아하는 괴상한 넘이 없으리란 법은 없쟎아.

이번 기회에 나도 말로만 듣던 로카의 눈 꽃도 좀 구경하고... 그래 나쁘지만은 않겠지. 누이여신의 축복이 함께 한다면...

미칠 것 같은 억울함과 스스로의 멍청함에 대한 자책을 끊임없이 궁시렁 되면서도 동대륙으로 항해할 배를 찾아 항구를 찾아가는 발길은 묘하게 가볍기만 했다.

부디 그대가 걸어가는 앞에 누이여신의 축복이 있기를...

소설응모

태그는 148개 글로 이야기 중입니다.
1 ... 7 8 9 10 11 12 13 14 15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