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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낼 수 없는 임무

이번 임무는 그동안 맡았던 다른 임무들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원정대장으로부터 극비리에 전달받은 지령서에는 의뢰에 대한 내용이 일체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S급, 태양이 눈을 감을 때, 로카 구름 협곡 B3. 즉시 파기.’

나는 수백가지 암호와 약어가 빼곡히 적혀있던 [정예 원정대원의 지침서]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B3 가 도대체 어디야. 대장은 정말 그런걸 다 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미 여러 곳을 돌아보며 허탕을 쳤기 때문에,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예상했던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근처의 수풀 사이에 쓰러져 있던 하리하란 남성을 발견했다. 빠르게 다가가 살펴보니 남자는 숨이 끊어진지 몇일 된 듯 했다. 평범한 행상의 차림을 하고 있었던 그는 마치 중요한 물건인 듯 보이는 무언가를 오른손에 꽉 움켜쥐고 있었다.

'푸른 소금 상회의 사람인가... 이건 뭐지?'

그가 움켜쥐고 있던 것은 얼핏 보기엔 투박해 보이는 작은 돌 조각일 뿐이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신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임무와 관련된 사람인 것 같은데...'

무언가 엄청난 일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한 나는,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돌 조각을 품에 넣었고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 원정대의 본거지로 복귀하기로 했다. 무사히 구름협곡을 벗어났지만 한가지 생각이 계속 내 의지와 이성을 괴롭혀왔다.(주1-1)

‘이 남자보다 내가 먼저 왔었더라면...’

최고수준의 비밀 임무는 의외로 싱겁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매우 비밀스러운 임무인 까닭에 사전정보의 탐색과 작전 수립이 매우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원정대의 다른 대원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 왜 온단 말인가? 대장이 위험한 상황과 임무의 중요성을 고려해 이중으로 대원을 파견했다면 그 남자를 죽인 쪽도 그 정도 대응을 하지 말란 법이 없다.

혹시 이 남자는 우리의 임무를 방해하다 살해된 것인가? 그것은 더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현장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정예 원정대원이 저지를 실수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를 방해하는 자들의 소행이라 보는 것도 이상하다. 그들 역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고 시체를 수색해서 중요해 보이는 물건은 회수해 갔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손에 든 돌은 꺼내가지 않은 것인가. 함정? 실수? 사고?

내가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을 되뇌며 나는 깊은 두려움과 막연함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감당해 보지 못한 혼란,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라앉고도 닿지 못한 바닥. 어느 순간 나는 깊게 잠겨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의미 없이 칼을 휘두르며 죽어나간 무수한 풋내기 대원마냥 맹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경직되고 맹목적인, 그런 만큼 과장되고 소모적인 허우적거림처럼 나는 몇일을 밤낮 없이 걸어 원정대의 본거지가 위치한 하슬라에 다다르게 되었다. 늦가을의 맑은 하늘 아래 잔잔한 바람이 하슬라의 대숲을 빗어 넘길 때, 비로소 나는 바닥에 발이 닿은 듯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 그냥 불길한 예감 뿐 이었을 지도 몰라.’

그때였다. 쉼 없이 걸어서 피곤한 탓이었는지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그 돌 때문이었는지 대숲 사이를 거닐던 사슴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와 한마디를 건넸다. 의미 없이 하늘을 떠다니는 꿈 같은 느낌이었다.

“돌을 주웠나?”

내가 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슴이라니... 게다가 말까지 한다. 이런 상황은 칼을 뽑아들어 해결할 문제가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짐짓 침착한 척 말했다.

“돌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저녁거리처럼 보이는 사슴에게 던질 돌을 말하는 건가?”

그러자 사슴이 싱겁다는 듯 대꾸했다.

“저녁밥은 먹을 필요가 없을 거야. 그때까지 살아있지 못할 테니까”

“내가 죽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시체와 노닥거릴 만큼 성실한 성격이 아니야. 운이 좋아 계속 살아 있다면 다시 나와 만날 때가 올 테니 이쯤에서 그만하지.”

뒤늦게 확인된 불길한 예감. 더 이상 물어볼 것도, 궁금한 것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황당하고 막연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

그러자 그 사슴은 몹시 지루해 하는 말투로 내게 답했다.

“나? 그냥 만찬 테이블 위의 후추 병 같은 녀석이라 해 두자고.”(주1-2)

그 사슴은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까마귀가 되어 대숲의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의 시작. 바닥 모를 불길한 예감의 확인은 확실히 그에 걸맞는 기묘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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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제시문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 맞게 윤문했습니다.
(주1-2) 사슴은 루키우스 퀸토이며 후추 병 같다는 표현은 홈페이지의 ‘루키우스의 기록 - 12명의 영웅들 : 프롤로그’에서 루키우스 퀸토가 스스로를 일컫는 표현이고 이를 연계했습니다.



2. 다시 로카의 장기말들로

원정대의 본거지가 위치한 비취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대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없고 집기와 서류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대장의 책상 위에는 늘 그랬듯 도박 카드만 널브러져 있을 뿐.

'B3'

갑자기 지령서의 좌표가 떠올랐다. 대장과 나, 혹은 죽은 그 남자만 알고 있는 메시지라면 그것이 다른 단서로도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B카드와 3카드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보자 카드의 사방 가장자리에 작고 이상한 줄이 그어져 있었다. 가장자리에 그어진 줄, 진부하지만 단서 없인 알아채기 힘든 암호. 나는 두 카드를 사방으로 이리저리 맞춰 가며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카드를 베로에의 신기루섬 경매인에게’

신기루섬 경매인이라면 다루족인데, 다루족이 무슨 이유로 이 임무와 관련된 것인지 몹시 의아했다. 그들은 오로지 주화 수집에만 관심이 있어서 이런 위험한 의뢰는 맡길 일이 없고 그런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기루섬에 가봐라 루루. 좋은 물건이 많다 루루.“(주2-1)

여느 때처럼 큰 목소리로 호객을 하는 경매인에게 카드를 보여주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방을 살피더니 내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돌은 가지고 왔겠지? 어디 한번 보여달라 루루.”

“돌이라니 무슨 돌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난 그저 우리 대장을 찾으러 왔을 뿐이야.”

그러자 경매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의뢰는 내가 맡긴 의뢰이니 돌을 내게 달라 루루. 그렇지 않고서야 자네가 돌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루루.”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뢰의 내용과 의뢰인을 전혀 알 수 없는 비밀지령서를 통해 수행한 임무를 의뢰인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비밀지령을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당시에 그런 판단까지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몸에 배인 원칙에 따랐을 뿐이다. 임무의 보고와 물건의 전달은 반드시 원정대장에게 한다는 것, 그 뒤의 일은 원정대장의 책임과 권한이라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확실히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한 나는 경매인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리 원정대장은 어디에 있나? 자네는 도대체 이번 임무를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답답하다 루루. 원정대장은 신기루섬에 갔으니 들어가서 직접 물어봐라 루루.”(주2-2)

나는 이 말을 듣고 바로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원정대장은 임무의 연계와 변동사항의 전달을 원정대원 이외의 자에게 절대 맡기지 않는다. [정예 원정대원의 지침서]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 ‘원정대원이 아닌자의 전달사항은 임무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임무의 보고를 위해 신기루 섬으로 들어가라는 경매인의 말은 분명 이상하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도대체 원정대장은 어떻게 된 것인가? 왜 다루족이 이 일에 개입된 것인가? 확실한 것은 우리 원정대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원정대원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대장은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인지...

방법은 단 하나 뿐. 추가적인 단서의 탐색을 위해 돌을 발견했던 그 장소로 다시 가는 것이다. 몹시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로카의 장기말들을 향해 돌아온 길을 되짚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슴을 만난 그 대숲에 이르렀고 잠시 주춤했다.

‘저녁까지 살아있지 못한다고 했었는데...’

말하는 사슴의 불길한 예언이 어느 정도 맞아가고 있다는 느낌에 몹시 두려워졌다.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대숲의 오솔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녁은 먹고 달려야지. 로카까지 한달음에 갈 생각인가?”

“으아악!”

사라졌던 사슴이 바로 내 옆에서 말을 걸어왔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사슴은 넘어진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꼴이 우습게 되었군. 죽을 운명을 벗어났으니 우습게 된거야.”

“무슨 말이지? 내가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지. 오늘 저녁에 죽지는 않는다는 거야. 아까 신기루섬에 갔으면 넌 죽은 목숨이었다고.”

도대체 이 사슴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사슴이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이 나를 돕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었던 나는 이 사슴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를 도와주십시오. 일전의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아... 괜찮아. 그런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그나저나 자네 정말 그곳에 다시 갈 생각인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달릴 바에야 숨어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숨는다고 해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루족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길로 다니는 것도 어쩌면 포기 해야겠지요 순환마차까지 피하며 살 바에야 다시 가서 뭐라도 알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주2-3)

사슴은 갑자기 까마귀로 변하더니 내 어깨 위에 앉았다.(주2-4)

“이편이 낫겠군. 사슴과 산책이라니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그나저나 역시 살 만하니 살아났구만 하하하 난 자네가 죽을 줄 알았어. 수 천년을 살았어도 역시 앞일은 모르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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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1) 게임상의 신기루섬 경매인 멘트입니다.
(주2-2) 게임상에서 신기루섬 경매인의 옆에는 신기루섬으로 통하는 공간의 틈이 있습니다.
(주2-3) 게임상에서 필드의 주요 도로에는 다루족이 운전하는 순환마차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주2-4) 게임상에서 루키우스 퀸토는 까마귀의 모습도 하고 있습니다.



3. 의혹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시체가 있던 그곳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까마귀가 하늘 위에서 감시해 준 덕분에 순환마차가 올 때만 길 옆에 숨어 편하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나의 물음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누가 올 때만 보통의 까마귀처럼 울어댈 뿐.

목적지 주변에 도착한 후 까마귀는 하늘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곳에 다시 올지도, 이미 왔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겠지. 한참을 돌던 까마귀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까마귀가 사라지자 나는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시체가 있던 곳에서는 시체는 물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꽤 먼 주변까지 샅샅이 수색했지만 역시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밤이 되자 너무 피곤한 탓에 수색은 힘들어졌고 내일을 기약하며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하지만 인근의 마을에서 잠을 청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된지라 구름협곡 주위의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물고 현장과 적당히 떨어진 협곡 봉우리의 능선을 물색하던 중 맞은편 능선에 뭔가 눈길을 끄는 어색한 풍경이 보였다. 나무가 빽빽이 자란 산허리에 동그랗게 비어 있는 부분이 보인 것이다. 자연적으로 만들어 졌다고는 보기 힘들만큼 동그랗게 패인 그 곳에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고 수풀만 우거져 있었다.

‘혹시 이번 일과 관련 된 것은 아닐까?’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발견하지 못한 터에 피곤한 기색도 잊은 채 반대편 능선을 향해 급하게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역시나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멀리서는 수풀로 보였지만 주위에서 긁어 온 듯한 나뭇가지와 잡풀로 얼기설기 바닥을 가렸고, 그것들을 치우자 애써 덮어놓은 흙무더기가 제대로 다져지지 못해서 약간의 힘만 주어도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봐도 급하게 수습한 것임에 틀림없었고 나는 그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십자별 평원의 저주받은 대지”

흙을 걷어내자 드러난 바닥을 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게 그을려진 바닥은 딱딱했고 약간의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돌을 꺼내 바라보며 이 돌이 저주받은 물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십자별 평원을 파멸시킨 그 저주가 이 땅에도 내린다는 전조인가? 원정대가 사라진 것도, 좀체 나서지 않는 다루족이 개입된 것도, 말하는 까마귀의 도움을 받은 것도 모두 설명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흙무더기 이곳 저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이 이상한 돌과 같은 것을 찾아낸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밤이 밝아 수색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지만 아침이 다 되도록 흙을 파헤쳐도 이 돌과 같은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여명이 트자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파헤쳐진 이곳은 이제 멀리서도 잘 보이게 되어 위험해질 수 있고 그렇다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다시 흙을 덥고 수풀로 가리자니 반나절은 족히 걸릴 듯 하여 빨리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 돌이 저곳에서 나온 것은 확실한가? 도대체 저 구덩이는 왜 생긴 것인가?

유일한 단서를 얻었으나 얼마나 위험한 임무인지만 확인한 셈이었고 이 돌의 정체는 보통의 방법을 통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하리라 판단했다.



4. 으르렁거리는 섬으로

임무를 처리하다 보면 별 꼴을 많이 보게 마련이다. 난잡한 치정극의 한가운데 서는 것이나 비열한 통치자의 위선을 은폐해 주는 정도는 예삿일. 갖가지 신기해 보이는 물건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떠돌이 장사꾼을 만나는 일이나 허튼 소리로 사람을 얼간이로 만드는 밤의 이야기꾼 같은 족속들은 그런 의뢰인들 만큼이나 미덥지 못한 부류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늘 상대할 수밖에 없는 소중한 정보원들이다. 그들이 내뱉어대는 온갖 헛소리들은 저잣거리의 가판에 진열된 그럴싸한 골동품 같은 것들이라 재주껏 골라내면 상당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넘치는 부와 환락, 퇴폐의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하는 곳. 카어노르드에 도착한 나는 늦은 밤 환락가 인근에서 술에 취한 귀족들을 대상으로 협잡에 정신이 팔린 ‘밤의 이야기꾼’ 아라기를 찾았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들 틈에서 그녀를 끌어내 인적이 드문 항구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주4-1)

“도대체 언제까지 ‘마법사왕 이야기’ 따위의 조잡한 소설책이나 팔고 다닐 셈이지? 너 정도면 우리 원정대의 정보원으로 손색이 없다고. 정신 나간 놈들 상대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나를 따라와.”(주4-2)

“‘왕녀의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 정말 책 내용 그대로였다고...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보석이었지. 보석 안을 바라보면 마치 바다 속의 왕녀가 속삭이는 듯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쳤다고...”(주4-3)

“나한테까지 그런 소릴 하는군 후후. 혹시 이 세상에서 가장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아하하. 냉정한 척 하더니 그 보석을 찾아다닌 모양이구만. 혹시 그 보석을 찾았나? 어디 한번 보여줘 봐. 예전에 봤던 것과 같은 건지 내가 금방 알 수 있으니까.”

“보석 따윈 없어. 그냥 묻는 말에나 좀 대답하지 그래?”

“푸훗. 그래. 알려주지. 황금평원 비행선 연구소의 대장장이인 뷰러리리가 전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대장장이라 할 만하지.”(주4-4)

다루족의 대장장이가 가장 뛰어난 기술자이자 공학자임은 정평이 난 터라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루족에게 접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고는 더 이상 없나? 다루족은 좀...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이라서 말이지...”

“음... 다루족을 제외하고는 으르렁거리는 섬의 대장장이 카멜론이 최고라고 들었어.”(주4-5)

“해적섬 따위에 있는 대장장이가 무슨 최고의 대장장이란 말이야? 농담할 기분이 아냐. 이따위 정보에도 사례가 필요한 건가?”

“그런건 필요 없어 그저 네가 ‘왕녀의 얼어붙은 심장’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반가울 뿐이야. 푸훕”

“더 이상 할 말이 없군.”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악랄한 사기꾼이 아니다. 그저 환상 같은 옛 이야기에 빠져 자신의 어리석음을 전염시킬 뿐. 그녀만큼 카어노르드의 어수선한 밤에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녀와 나는 같은 일을 하지 않지만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남들이 본 것을 내게 알려주고,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조각을 손에 들고 막연히 넓은 퍼즐을 같이 맞춰가는 듯, 서로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것이 잘못 놓여진 조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예외적인 경우엔 비약적인 시도에 끌리게 되는 법.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카멜론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카어노르드 항구에서 무역상단의 배를 통해 자유도에 도착할 수 있었고 다시 해적의 보급선으로 갈아 타 으르렁거리는 섬으로 들어갔다. 처음 만난 카멜론은 마치 나 같은 사람에 익숙하다는 듯 다짜고짜 물건부터 보자고 했다.

“처음 보는 보석이나 물건이라고 해봤자 이미 수백번도 더 본 것들이지. 당신 같은 사람들이나 처음 보는 것이겠지만 이사람 저사람 할 것 없이 다 들고 오니 모르는게 없어지더라고. 뭐, 얼마 전에 본 ‘죽은 왕녀의 반지’ 같은건 좀 의외였지만...”(주4-5)

아라기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여겼던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대장장이에게 돌을 보여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약간의 희망이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카멜론에게 돌을 보여주었지만 실망스런 대답밖엔 들을 수가 없었다.

“오... 이런 것은 처음 보는군. 신기한 돌이라고 해서 가져와 봤자 별의 파편 따위나 달의 조각 같은 것들 뿐 이지... 그런건 수도 없이 다뤄봤지만 이런 건 정말 처음이야.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이라면 확실하지. 이건 아무래도 이 세상 물건은 아닌 것 같군.”(주4-6)

“그 돌이 발견된 곳은 움푹 패이고 불길에 휩싸인 곳이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했지만 실제로 떨어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죠.”

그러자 카멜론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자신 있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 그렇다면 운석이겠군. 운석이라면 나도 많이 봤고 귀한 물건이라 예도의 장식으로 만들어보기도 했지. 이곳의 해적들이 나에게 가끔 가져다주는 물건이긴 하지만 이런 종류는 처음 봐. 해적들은 온 바다를 누비기 때문에 별 이상한 것들을 많이 가져오는데 운석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고 거기서 거기거든. 근데 이건 정말 특이하군.”

“이 돌에 대해 알 방법은 그럼 없는 겁니까?”

“아 없진 않지. 나야 물건을 받아서 만들어 주는 사람이지만 저기 옆의 트랄루루는 해적들이 가져온 온갖 물건을 맡아주는 녀석이거든. 저 녀석이 나보다 아는게 많을 거야.”(주4-7)

“다루족이 해적일 수도 있는 겁니까?”

“아... 하하하 저 친구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구만. 이봐. 이곳에 믿을 수 있는 녀석은 없어. 대신 실력 좋은 녀석은 차고 넘쳤지. 자네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이곳에 왔나?”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했다. 다루족이긴 해도 그들은 각자 자기가 위치한 곳의 질서를 따르며 그저 실리만을 찾는 존재. 따라서 그도 해적과 같지 않을까? 다소 위험하지만 잘못되더라도 해적섬인 이곳에서 잡힐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내 운명을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되었다.(주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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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1)~(주4-5) 서사에 대한 이해와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에픽 퀘스트인 ‘죽은 왕녀의 반지’ 퀘스트를 이 소설과 병렬로 놓아 기존의 세계관과 연계가 되도록 했습니다. 등장인물과 설정, 아이템은 ‘죽은 왕녀의 반지’ 퀘스트 과정에서 실제로 등장합니다.

(주4-6) 별의 파편과 달의 조각은 모두 게임상 실제로 있는 아이템이고 제작재료입니다.

(주4-7) 트랄루루는 게임상 으르렁거리는 섬의 창고 관리인입니다. 해적섬이지만 창고 관리인도 다루족입니다.

(주4-8) 다루족은 각 대륙, 왕국 간 중립을 지키고 있고 현지의 질서에 따른다는 기존의 세계관에 착안했습니다.



5. 트랄루루와의 만남

“어이 트랄루루 여기와 이것 좀 보라고. 나도 이런건 본 적이 없어. 뭔지 알겠나?”

카멜론은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트랄루루를 불렀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고, 다른 방법도 없는 것을 잘 아는 눈치였다. 이런 곳 까지 와서 해적인 자신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가 택할 수 있는 차선책 따윈 어차피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엥? 이게 뭐냐 루루. 나도 처음 보는 돌이다 루루. 신기하긴 하지만 쓸모는 없어보인다 루루.”

그는 돌을 보자 관심이 없다는 듯 뒤돌아 갔다. 다루족은 돈이 되는 것이 아니면 관심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먼 바다를 건너 으르렁거리는 섬까지 왔지만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었고 나는 자유도로 돌아가는 배를 얻어 탔다.

배에서 뒤돌아 본 섬은 마치 이 곳을 찾을 때의 희망이 사라져가는 듯 점점 눈앞에서 멀어지고 작아져갔다. 뱃전에 펼쳐진 망망한 대해가 마치 내 처지를 보여주는 듯 막연하여 무기력한 비감에 젖어 들었지만 이 일로 인해 다루족에게 내 위치가 드러나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닌지 몹시 걱정되어 불안한 마음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 배는 자유도로 가는 배가 아니다 루루.”

착찹한 심정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중에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트랄루루? 어째서 그가 이 배를 탄 것이지? 탈때는 분명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 배는 내가 자유도에서 왔을 때 탄 배가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다. 항해사는 분명 자유도로 가는 배라고 했건만 다시 보니 보급선으로 보기엔 짐도 적고 무장도 상당히 되어있었다.

“어? 당신이 왜 이 배를 탄 거지? 이 배는 자유도로 가는 배라고 들었는데?”

“네가 들은 말은 잘 못 들은 말이 아니다 루루. 우리는 너를 섬에서 자연스럽게 빼내기 위해 너를 속였다 루루.”

놀랍게도 그는 원정대장의 서명과 날인이 찍힌 계약서를 내게 보여주었다. 계약서엔 비밀지령서의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좌표가 대신 적혀있었다. 분명하다. [정예 원정대원의 지침서]상 암호 좌표인 B3가 의미하는 곳과 일치했다. 계약서를 유심히 보고 있는 나에게 그는 나를 빼낸 이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이 의뢰에 대한 전말을 들을 수 있었고 이 일은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별을 바라보는 자, 세계를 움직이는 은밀한 손. 지금 나와 우리를 일컫는 자들의 표현 중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이때부터 어디에도 속할 수 없으면서 어디에나 속해있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 정확히 나를, 우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 배는 우리 ‘이름 없는 상단’의 배고 내가 선장이다 루루. 혹시 델피나드의 별을 갖고 있나 루루? 좀 긴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걸 들려 주겠다 루루.”

나는 여비로 항상 휴대하고 있던 델피나드의 별 두어 푼을 탁자위에 올려놓았고 주머니에 꽁꽁 싸맨 그 돌도 옆에 두었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 앉아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정대장에게 이 의뢰를 맡긴 것은 바로 ‘이름 없는 상단’이었다. 의뢰자가 누구인지도, 의뢰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면 원정대장도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의뢰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돌을 최대한 비밀스럽게 확보하여 자신들에게 가져다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일을 맡은 것 뿐이다. 원정대장은 이들이 돈 많은 수집가거나 어느 왕가에 속한 연구소 소속인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 세상 권력의 근원적 바탕에 접한 일이었고 안타깝게도 비싼 보수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원정대장과 다른 원정대원들은 벅시루루 친위대의 거짓 회유에 속아 어디론가 따라갔고 결국 나 혼자만 남게 된 것이다.

‘빛과 장미의 시대’에 만들어진 ‘델피나드의 천체망원경’은 총 2대가 현존하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망원경이다. 이 중 하나는 ‘이름 없는 상단’이 가지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신기루섬의 관리인이자 도박왕인 벅시루루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이 돌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들은 돌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곤 했다. 따라서 비밀지령서를 통해 알려준 위치는 ‘이름 없는 상단’ 뿐 아니라 벅시루루의 친위대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주5-1)

돌을 발견한 곳에서 죽은 시체? 벅시루루의 친위대가 남겨둔 함정이었다. 돌이 땅에 떨어지자 친위대는 상단과 돌을 두고 충돌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살한 상단원의 시체에 돌을 쥐어 놓았다. 하지만 비밀지령서의 좌표를 두고 내가 우왕좌왕한 덕분에 돌이 떨어진 뒤 4일이 지나서야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수행자들이 자주 찾는 구름협곡에 마냥 친위대를 잠복시킬 수 없어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그 대신 현장에 돌의 일부를 남겨두어 추적 작전을 이어간 것이다. 이는 원정대장과 잔류 대원들 외에 찾아내지 못한 파견 대원의 신변을 쉽게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전에 벅시루루의 친위대는 원정대장을 구슬려 비밀지령서의 내용을 확보했고 자리를 비운 나를 돌아오게 하기 위한 카드암호를 남겨 놨다. 그들은 하슬라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내가 신기루섬 경매인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도록 하는데 까진 성공했지만 계산한 대로 신기루섬 까지 들어가게 하는 것엔 실패했다.

갖가지 임무를 수행하며 몸에 밴 기본적인 원칙들이 내 목숨을 살려 준 것이다. 또한 다루족은 돌과 관련된 일을 매우 은밀하게 처리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가급적 소란이 발생하길 원치 않았던 것도 내가 죽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이들은 다루족과 경쟁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 돌이 무엇이기에 이들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돌을 구하려 하는 것인가? 어째서 트랄루루는 동족이자 자신의 통치자인 벅시루루와 경쟁하는 것인가?

“왜 다루족이 델피나드의 별을 수집한다고 생각하냐 루루? 어째서 금화일 뿐인 델피나드의 별을 더 이상 만들 수 없는지 생각해 본 적 없나 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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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1) 아키에이지의 각종 이벤트와 아이템에는 벅시루루가 다루족의 왕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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