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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왕자비로 내정되었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솔즈리드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이어지는 이야기


“그 귀걸이 당신과 잘 어울리는군요.”
소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전신을 덮는 망토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가 웃고 있었다. 그가 펼친 손바닥 위에 소녀가 주워 든 귀걸이의 다른 한 짝이 반짝거렸다.
소녀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귀걸이를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조건만 제대로 지킬 수 있다면 그냥 가져도 됩니다.”
그의 조건은 간단했다. 잃어버리거나 팔거나 망가뜨리거나 하지 않고 그 귀걸이 한 짝을 죽을 때까지 간직해 줄 것. 그저 잘 갖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에 소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귀걸이의 화려한 사파이어는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
세월이 흘러 소녀는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도와줄 만한 친척도 없었다. 그녀의 외가가 과거에 트리스테 가문과 연관 있던 귀족 가문이라고 하지만 정말 먼 옛날이야기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때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리아노플 보석상에서 귀걸이를 꺼내들었을 때 귀걸이의 보석은 돌로 변해 있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의 앞에 예전 카페 앞에서 만난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당신이 약속을 어겨서 사파이어가 돌로 변한 겁니다. 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드리죠. 자격을 갖춘 또 다른 사람을 찾기엔, 저도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요.”


#
그녀는 결국 귀걸이를 가지고 다시 솔즈리드 마을로 돌아왔다. 남한테 팔 수도, 행여 잃어버릴까 쉬이 자랑할 수도 없는 한 짝 뿐인 사파이어 귀걸이였지만 잃고 싶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잔재를 품고 귀걸이를 간직했다.
십년이 지난 후, 그녀는 병에 걸렸다. 의사는 치료법을 찾을 수 없는 병이라 했다. 가족이 외출하고 홀로 집에 누워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 날, 사파이어 귀걸이의 다른 짝을 가지고 그 남자가 찾아왔다. 소녀 시절 카페 앞에서, 결혼 이후 보석상 앞에서, 그리고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외모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엘프라는 걸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그에겐 소원이 있었다. 소원 하나만 보고 그걸 이루기 위해 동족이 사는 숲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 언저리를 떠돌았다.
그 소원이란 바로 사라진 친구가 남긴 편지를 읽는 것.
그 편지는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에 봉인되어 있었다.
“봉인을 푸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했죠. 만족시키기가 힘들었습니다. 전 너무 수명이 길고 애초에 두 번째 조건부터 맞지 않으니 자살할 수도 없었죠. 결국 다른 사람을 이용해야 했는데, 다들 이 귀걸이를 오래 가지고 있질 못하더군요. 어떻게 된 건지 항상 귀걸이는 버려져서 제게 다시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귀걸이를 주웠던 사람들은 대체로 불행해졌다. 마리아노플 카페 거리에는 떨어진 장신구는 줍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돌 지경이었다.
짝이 맞춰진 사파이어 귀걸이가 새파란 빛을 내뿜더니 글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는 꺼져가는 정신을 붙들고 애써 그 글자들을 읽어보았다.


귀걸이에 담긴 기억을 꺼내는 법

1. 귀걸이의 소유주가 소유권을 가진 상태로 생(life)의 끝에 도달할 것
2. 단 1의 조건은 귀걸이에 기억이 담겨 있다는 것을 소유주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성립함.


글자가 사라지고 빛이 흩어진 후 낡은 편지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엘프는 그 편지를 줍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마법을 걸었다.
“미약하지만 약간이나마 생명력을 연장시켜 두었습니다. 마지막은 가족 친지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겁니다.”


기다림이 끝이 났다.
애초에 귀걸이를 주워서 가진 자들을 바로 죽였다면 이렇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소녀를 목 졸라 살해한 후부터 살인이 힘들었다. 죽이고자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고 겨우 결심이 서도 어이없이 실패하곤 했다. 결국 기다리고 기다렸다. 계속 과거의 그날들을 더듬으면서.
이번에 그 기다림이 다시 수포가 될까 무서워 중간에 끼어들기까지 했으면서 끝내 죽이지 못했다. 아니,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끝은 예상보다 조금은 이르게 다가왔다.
편지가 사락 소리 나며 펼쳐졌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루온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이 세상에 없겠지.
아마 죽은 지 오래일거야. 아니, 그 애의 죽음 이후 네 표정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그럴 거라 생각해. 난 네가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길 원했어.
먼저 하나 고백할게. 네가 죽인 그 소녀는 진짜 마리안 트리스테가 아니야.
마리안 트리스테의 어머니에겐 끔찍한 공포가 있었어. 트리스테의 피가 흐르는 여자들은 비참하거나 어두운 삶을 산다는. 그 예언자의 말에 따라 남편의 고모할머니나 자신의 시누이들에게 벌어진 일들이 자기 딸에게도 일어날 거라 믿은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지. 그래서 피엘이 만들어졌어.
어쨌든 마리안 트리스테라는 이름은 이제 없어. 이름도, 그 이름을 담을 육신도 아무것도 없어. 가짜는 죽었고 진짜는 이젠 없지.
어머니도, 그녀를 둘러싼 트리스테 가문의 개들도, 그리고 그녀의 딸들도.... 모두 사라졌어.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마리아노플에서 떠돌지 않아도 돼. 더 이상 누구를 더 죽여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돼.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해도 이 편지를 꺼낼 즈음에는 모두 사라져 있을 거야.
너의 복수는 완성되었어.

추신: 편지로만 해주겠다는 말은 이미 다했어.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왜 이렇게 미련이 많이 남는지. 어쨌든 내 마지막이 너의 친구 피엘이라는 데는 만족해.
이제 정말 더 안 쓴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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