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네비게이션

전체글

"이봐, 용사가 무슨 바느질이야?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마지막 바느질을 끝낸 날 바라보던 동료가 물었다. 대답 대신 눈을 감고, 나는 그곳을 떠올렸다.
눈을 감자 떠오르는 아련한 공간의 기억이 그곳으로 바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촌장님은 별일 없으실까? 그 소녀는 이 인형을 마음에 들어 할까?
새로운 문명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된 모든 것의 시작, 그곳으로 나는 오늘 돌아간다.
동료에게 손 인사를 건네고, 이지의 아들에 올라탔다.
"자, 이제 가보자!"
바다를 가르는 질주가 시작되었다.

---------------------------------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후회하고 있다.
바다는, 홀로 횡단하기엔 너무나 드넓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드넓은 바다를 횡단한다는 것은 이지의 아들이 아니라 설령 이지의 아빠, 이지의 사촌누나, 이지의 할아버지를 타고 간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음이 옳았으리라.

내가 용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나의 친구 이지의 아들도 애처롭게 지느러미를 푸들거리며 자신의 한계가 다가왔음을 알려왔다. 아무리 바다를 자유롭게 누빈다는 이지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십여 일간의 휴식 없는 강행군은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용사인 나조차 장시간의 탑승 끝에 양쪽 허벅지에 알이 배길 마당에, 여기까지 노력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이지의 아들에게 감사했다.

-무우우우우우

그 때, 이지의 아들이 주둥이를 치켜들고 목울대를 길게 울리며 소리를 냈다. 이건 이지의 아들이 가끔씩 동료로부터 대형 청새치를 얻어먹었을 때나 내던, 기분이 최고로 좋다는 신호다. 이지의 아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멀리 해수면 저편에 섬이 보였다. 분명 저기서 나도 쉬고, 자신도 조금이나마 쉬어가자는 뜻이리라.
어디 지도를 보자. 으르렁거리는 섬이라. 참 특이한 이름의 섬이다.

아직 지도에 표시조차 되어있지 않고 이름도 없는, 미발견의 섬과 무인도, 바다의 미개척지들도 상당하니까 지도에도 표시가 되어있고 이름까지 있는 섬이라면 사람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계속해서 이지의 아들을 타고 바다를 횡단하는 것도 지쳤고 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기에, 저 섬에 도착하면 배를 한 척 얻고, 이제 이지의 아들은 놓아주어야겠다. 나 때문에 온갖 험한 바다를 누볐던 이지의 아들도, 이제 참한 이지의 딸이라도 만나 가정도 꾸리고 자유를 누려야하겠지. 나는 이지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앞에 보이는 섬으로 가자는 뜻을 보냈다.

섬이 가까워질수록, 한 함대는 충분히 정박할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규모의 항구, 또 그 항구를 채우고 있는 다수의 중형 범선과 소형 범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견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즈나 왕국의 해상을 지배한다는 노르예트 가문 해양 선단의 규모와 필적한다. 각 범선마다 장착되어있는 불그스름한 신화급의 대포와 검은 해골 선수상을 본다면 오히려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단순히 지도에 표시가 된 중간 섬의 규모는 일찍이 넘어선, 군사요새 수준이다. 거기에 검은 빛을 띤 불길한 돛이라니. 느낌이 싸하다.

이지의 아들도 그걸 느꼈는지 차마 섬에 더 다가가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돈다. 아무래도 편히 쉬어갈만한 분위기의 섬은 아닌 듯하다. 이지의 아들에게 섬을 피해 크게 돌아가자는 뜻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듯싶다. 우리를 눈치 챘는지, 한 척의 소형 범선이 순풍을 받아 이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아무리 이지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순풍을 탄 소형 범선을 따돌릴 순 없으리라. 나는 이지의 아들과의 이별의 시간이 지금임을 직감했다. 섬에 도착한 뒤에 지금껏 고생한 이지의 아들에게 정력에 좋다는 황홀한 여명이라도 한 병 먹여 보내려고 했지만 그럴 여유는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서둘러 이지의 아들을 보내자마자 거대한 크기의 소형범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갑판 위에 나와 있는 선원들이 하나같이 얼굴에 한 두 개의 칼자국은 기본으로 달고 있는 험악한 자들인 것으로 보아 불길한 예감이 더욱 커진다.

“살다 살다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오는 놈은 처음이구나! 이 배는 대해적 랑그레이 님의 배다! 가진 것, 안 가진 것 가리지 말고 살고 싶다면 일단 다 내놔라!”

대머리에 검은 안대를 차고 있는 선원 하나가 누런 이를 빛내며 킬킬거린다.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해적인 것이다. 아무리 내가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무력을 가진 용사라 할지라도 붉은 빛이 감도는 신화급 대포를 직격으로 견뎌낼 순 없을 것이다. 우선 대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야한다.
적어도 갑판에만 올라갈 수 있다면 저 배에 몇 명이 타고 있건 다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내가 아무반응을 보이지 않자 겁을 집어먹은 것이라 짐작한 선원 몇 명이 배에 밧줄을 내려 나를 끌어올린다.

“죽이진 않겠다. 값나가는 건 일단 다 꺼내놔”

해적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이끌려 갑판 위로 올라가자, 예상 밖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녹갈색 선장 모자를 쓴 여성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아하니 이 배의 선장은 특이하게도 여성인가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초승달 모양으로 휜 검은 눈썹과 오뚝한 코, 나름대로 험악한 인상을 쓰려 노력하지만 똘망똘망하니 빛나고 있는 눈동자는, 알고 있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있다.

“뭐하고 있어.. 으음?”

그 여자도 뭔가 느낌이 이상한지 미간을 찡그린다.

“이거.. 설마, 용사가 되겠다고 뛰쳐나간 바람그늘 마을 개백수 모르페우스 오빠?”

아아, 인형을 좋아하던 그 소녀, 랑그레이는 이미 다 자라 한 명의 여인이 되어있었구나.
나는 그제야 용사가 되겠다고 마을을 떠난 지가 벌써 십 년이 지났음을 자각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기억 속에 작은 소녀를 한 명의 성인으로 바꾸는데 충분하겠지.
가방에서 인형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지금이라도 이 인형을 준다면 좋아할까?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기대하지 못했던 만남이다.

“랑그레이, 촌장님은 잘 계시겠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본다.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 그런 시골 마을의 노친네 따위 알게 뭐야, 됐고 가진 거나 다 꺼내봐. 이 바닥은 얼굴 좀 안다고 해서 안 봐준다고”

빠직.
이마에 약간의 힘줄이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위험하다.

후우우-

소녀. 아니, 이제 어엿하게 성인이 된 랑그레이가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떼고 보란 듯이 내 얼굴을 향해 지독한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인형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동안 한 땀 한 땀 만들었던 인형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솜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아 뭐해? 빨리 안 꺼내고. 아는 사람이라고 안 봐준다니까?”

아아, 그래. 기억이 났다. 인형을 좋아하던 그 소녀는 참 고약한 녀석이었다.
사탕이 먹고 싶다고 내 지갑을 눈 앞에서 훔쳐 달아나던 말도 안되는 녀석이었지. 자기는 남의 것을 뺏는 게 좋다고 틈만 나면 해적이 될거라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녀석을 번쩍 들어 올려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때리곤 했었다.
나는 왜 이 아이에게 그토록 인형을 주고 싶어 했을까.

스르릉-

안탈론의 심장을 갈랐던 명검 뜨거운 맹세를 검집에서 꺼낸다. 검의 기운만으로 투기가 약한 해적들은 무릎을 꿇고 심지어 정신을 잃는다.
선원들이 다들 쓰러지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소녀, 다 자란 그 아이는 담뱃대를 떨어뜨리고 깜짝 놀란 눈빛을 보낸다.

“모.. 모르페우스 오빠?”

그래, 그래. 작은 소녀야.

“이 악물어라, 일단 좀 맞자.”


그 날, 나는 소녀를 따라 해적이 되었다.


소설응모

태그는 148개 글로 이야기 중입니다.
1 2 3 4 5 6 7 8 9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