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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왕자비로 내정되었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솔즈리드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꼬마야. 혹시 그 귀걸이 주운 것 아니니?"

매서운 눈매를 가진 젊은 여성이 소녀를 향해 말하자 소녀는 양심이 찔린 듯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소녀는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아니에요. 이건 제꺼라구요!"

힘겹게 용기를 내어 거짓말을 한 소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눈치를 살피듯 올려다보았고, 그녀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숙였다. 소녀의 눈높이를 맞춘 그녀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네 것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거야.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네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지. 조심하렴. 꼬마아가씨."


그녀는 겁에 질린 소녀를 지나쳐 걸어갔고, 소녀는 공포 속에서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이었다. 정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세 번 들려올 때, 작은 소녀의 실루엣 하나가 광장 중앙 분수대 앞에 섰다. 소녀의 눈은 영혼을 잃은 저승수비군처럼 창백했다. 소녀는 눈에 비친 무언가에 홀린 듯 작은 맨발을 부지런히 찍으며 나아갔다. 골목 사이사이를 걸어가던 소녀는 어느새 마리아노플 신전 중앙에 도착했다. 형체는 그곳에 심긴 늙은 전나무 가지에 걸쳐 시계추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소녀의 섬뜩한 호기심은 가까이 갈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형체는 피 묻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의 모습이 되었다. 흔들리는 다리에 맞춰 그녀의 귀걸이도 그네를 타고 있었다. 소녀는 망설이듯 주머니에서 작은 귀걸이를 쥐어 꺼냈다. 두 귀걸이는 같은 장인이 만든 듯 닮아 있었다. 여인이 말을 건넸다.

"너, 내가 보이는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멍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귀걸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볼래?"

소녀는 그저 가만히 서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내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왕족이었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었지. 그는 정략결혼으로 만난 내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어. 하지만 그가 준 것은 사랑이 아니었어."

한숨을 깊게 내쉬며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하아. 친절하고 자상했던 그를 난 사랑하게 되었어. 분명 내 감정은 진짜였어. 마지막 그 순간에 그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마저 감사했었으니까."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두 남녀가 손을 붙잡고 서있다. 둘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으며 춤을 추었고, 열정적인 리듬의 노래가 막을 내리자 주변에서는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리아노플의 왕자와 왕자비가 될 그녀를 향해 모두가 축복을 내리는 듯 했고, 그녀는 행복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왕자는 그녀를 불러세워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귀걸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오. 오늘 당신을 '다시' 보게되어 너무나도 기쁘오. 이 귀걸이를 '다시' 가져가시오."

그녀는 왕자의 말이 무언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기분이 좋은 탓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은 큰 실수였다.

어느 날, 침소에서 달콤한 잠을 청하던 그녀는 싸늘한 새벽 공기에 잠에서 깨었고, 으스스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왕자의 침소를 찾아갔다. 문 앞에 선 그녀는 침소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들었고, 살짝 문 틈 사이로 안을 훔쳐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 안에서는 왕자가 침대 위에 놓인 나체의 여인에게 예리해 보이는 단검을 무자비하게 난도질 하고 있었고, 여인은 이미 숨이 멎은 듯 단검의 잔인한 칼날이 자신의 몸을 유린할 때마다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훔쳐보던 그녀는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뒤돌아섰다. 그때, 갑자기 방 안에서 들리던 기괴한 소리는 멈추었고, 그녀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방문이 열리며 왕자는 작지만 그녀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이리 오시오.”

그녀는 왕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고, 왕자에게 다가가자 그는 손에 쥔 피 묻은 단검을 앞으로 내밀어보이며 말했다.

“내가 왜 이 이니스테르산 단검을 좋아하는지 아시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왕자는 단검을 느리게 돌리며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칼날이 절대 멈추지 않거든요. 예리하게 세공된 톱니모양 칼날은 잔인하게 상대방의 몸을 유린한 후에도 쉽게 빠져나오죠. 출혈을 더욱 심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녀는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로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대체.. 왜 이러는 건가요?”

그는 피식 웃으며 단검을 허리춤에 넣으며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그녀와 정말 닮았소. 그래서 난 당신을 처음보자마자 나의 왕비로 삼으려 했던 것이오. 하지만 오늘의 날 봤으니, 우리 결혼도 없던 일이 되어야만 하겠군. 안 그래?”

왕자는 손을 딱 튕겼고, 복도에 인기척 없이 숨어있던 검은 복면의 남자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쌌다. 그녀는 포박되면서도 애절하게 왕자를 바라보았고, 왕자는 그녀의 시선이 헝겊에 의해 가려지는 그 순간까지도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날, 왕자는 다급한 표정으로 왕실에 그녀가 납치되었다고 말했고, 왕실에서는 모든 인원을 동원해 그녀를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시신은 마리아노플 시내의 작은 카페 2층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이에 시민들은 슬퍼했고, 안타까워했으며, 또한 분노했다. 그 사건은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일단락되었고, 마리아노플은 다시금 활발한 분위기를 띄며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렇게 끝 난 건가요?"

소녀가 질문하자 그녀는 눈물을 머금으며 차갑게 말했다.

"아니,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


"제발 살려주세요. 네? 뭘 원하든 다 들어드릴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검은 복면들에게 납치된 후 얼굴이 가려진 채로 조용한 창고로 끌려왔고, 괴한들은 그녀를 앉히자마자 얼굴에 씌어있던 헝겊을 벗겼다. 어둠 속에 익숙해져있던 그녀는 시야를 회복하자마자 빠르게 괴한들을 둘러보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괴한들은 마치 땅 정령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서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헛간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자신이 왕자비가 될 것 인양 착각하고 있군. 넌 이제 끝났어.”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고, 남자는 느린 말투로 설명했다.

“네가 봤다시피 왕자는 제정신이 아냐. 살육을 즐기는 정신병자에 불과하지. 어차피 너도 계속 남아있다간 제물이 되었을 뿐이야. 이렇게 진실을 알고 죽는 것은 네가 처음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온몸을 떨고 있었고,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죽어간 여자는 넘치도록 많았어, 우리가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도 너무 많은 여자들을 죽여 왔기 때문이지.”

“그럼.. 그가 왜 그렇게 된 건지만 알려줘요. 원래부터 저러진 않았잖아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 그는 4년 전 그녀가 사랑했던 한 공주를 잃어버린 후부터 저렇게 변하기 시작했지. 피 묻은 손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다 결국 미쳐버린 왕자는 평상시엔 멀쩡해. 하지만 가끔 그녀의 기일이나 그녀를 생각하는 날이면 꼭 한명씩 칼로 난도질해 죽이거나 지금처럼 납치로 위장해서 죽이곤 하지. 나도 썩 이 방식이 맘에 들진 않아. 왕자가 사랑했던 공주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었거든. 하지만 당신은 조금 달랐었어. 가까이 있는 당신을 두고도 절대 손을 대지 않더군. 그 사파이어 귀걸이를 보고 난 깨달았지. 그게 그 사랑했던 공주의 것이었었지? 아마.”

그녀는 그제서야 그 사파이어 귀걸이를 받은 날 수상했던 왕자의 말투를 떠올렸고, 경악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젠 끝낼 시간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실루엣은 점점 왕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그녀는 크게 뜬 두 눈으로 왕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지 않았고, 그녀는 점점 목이 졸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을 쥔 왕자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녀를 닮은 당신은, 내 친히 죽여주리다.... 사랑하오.”


소녀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그래도 난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었고, 마지막 순간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며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이야길 듣고 죽었으니까. 아무튼 매일 밤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얘길 할 때면 조금씩 나아지는 기분이 들거든. 아쉽지만 너와도 이젠 안녕이구나. 넌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 귀걸이는 길가에 꼭 버리렴. 이야길 들어줘서 고마워, 예쁜 꼬마 아가씨. 그럼 안녕."

그녀는 허공을 미끄러지듯 사라졌고, 소녀의 멍하던 두 눈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이 이상한 곳에 와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귀걸이 한 짝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낮에 어떤 여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마자 손에 쥔 귀걸이를 바닥에 내팽겨 치고 비명을 지르며 달음박질 쳤다. 그리고 바닥에 남겨진 귀걸이의 사파이어는 달빛을 받아 섬뜩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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