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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가 백사장에 쓰러진 몸을 두드린다.
폭음 뒤의 숙취 같은 무거운 기운이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여긴 어디지? 그리고 나는...
내 이름은 이요르!
마리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로의 시험에 도전한 상태였어.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미로의 시험에 도전한 뒤의 기억이 전혀 없다.
짙은 안갯속에서 손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답답하다.
마리안 위어드윈드!
그녀를 만나면 이 답답한 마음이 금방 해결 될 것만 같다.

1. 일어나려고 하다가 고꾸라질 뻔했다. 젖은 몸은 무겁고, 모래가 발목을 붙잡고, 무엇보다 끔찍한 두통에 균형 잡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일어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빚어낸 듯 신선한 햇살이 보드라운 모래가 깔린 좁은 백사장과 산호색 바다에 쏟아지고, 뒤로는 울창한 숲이 생생한 녹음으로 압도하고 있다. 여긴 어디지? 제법 많은 발자국을 남겼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미로의 시험은 어떻게 됐을까? 기억을 되살려 봐도 미로에 들어선 순간부터 영영 어둠이다.

의기소침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우선 이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잠시 후 모래 위에 옅게 남긴 발자국을 찾았고, 발자국은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표 없이 숲에 들어갔다간 자칫 길을 잃는 수가 있지만, 적어도 현 상황에선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옳다고 판단했다. 나는 발자국을 따라 숲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며 몸 상태는 호전되었지만, 머리의 통증 여전했다. 나는 머리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꾸준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뜬금없이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작고 아담한 나무집이다. 숲 속에 집이라니. 발자국의 주인이 사는 것일까? 나는 집으로 다가가 현관문을 세 번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요르?”

전신을 훑는 아찔한 감각에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익숙한,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설마, 하는 의아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을 때린 것 같은 거대한 공명이 일며 나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그녀가 내 앞에 섰다.

“마리안... 마리안 위어드윈드!”

나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던지듯 뛰쳐나가며 나의 연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2. 몇 개의 하루가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이곳에 지내는 동안 나는 언제나 마리안과 함께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내 팔을 베고 잠든 그녀를 깨운다. 손을 잡고 백사장을 걷고, 숲으로 산책하러 나가기도 한다. 밤이 되면 그녀와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마리안이 잠들면 나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든다.

꿈결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마리안은 항상 내 눈길에 닿았고, 그녀는 나를 보며 웃어준다. 하지만 내 심장 속 무언가가 끊임없이 고동치며 나에게 의심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마리안이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미로의 시험 결과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곳과 관련된 의문을 가지면 어김없이 두통이 나를 후려쳤고, 모든 것을 그저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통증이 가라앉았다.

언젠가 통증을 참고 마리안에게 미로의 시험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로 말했다. “내가 여기 있잖아.”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제야 두통이 잦아들었다. 그 후로 나는 의심하기를 관두고 호기심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했었다.

나는 마리안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뺐다. 상체를 세워 벽에 기대어 창 너머를 바라본다. 이곳의 밤하늘은 언제나 은가루를 한 줌 흩뿌린 것 같아서 바라보고 있으면 아련한 감상에 빠지게 한다. 내가 아는 별자리 하나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마리안. 혹시 기억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언젠가 가랑돌 평원에서 네가 나를 구해준 적이 있었지.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어. 우린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잖아. 그중에 하나를 다시 해보고 싶어.”

어느새 마리안은 소리 없이 깨어나 맑은 두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트록스크 산 정상에 올랐을 때야. 나는 두려움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로 했어.”

그리고 통증이 찾아왔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이다. 머리가 아직 부서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의 아픔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결심한 대로, 시도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미로의 시험에 계속 도전하겠어. 초승달 왕좌의 왕이 되어서 너와의 약속을 지키겠어.”

말을 끝냄과 동시에 많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날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졌고, 하늘은 수천의 뇌전이 동시에 내려친 것처럼 붉은 선들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3. 나는 미로의 어딘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볼에 맺혔던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차가운 미로의 바닥을 적셨다. 벽을 짚고 다리에 힘을 줘서 일어선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한다. 미로의 끝이 어디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시 시도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기로 했다. 반드시 초승달 왕좌의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리안의 옆에 당당히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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