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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왕자비로 내정되었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솔즈리드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누군가가 흘리고간 푸른빛의 눈물
백년동안 마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었지
백년동안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 눈물
주인은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았건만
작은 눈물 한 방울을 사람들은 보고서도 잊어갔다네...

소녀는 깜짝 놀라서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마치 유령이 아닐까 싶도록 하얗고 투명한 얼굴의 은발 여인이 서 있었다.
거기다 소매가 길고 손목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치마는 발목까지 오는 새하얀 원피스가 마치 수의와 같은 느낌을 줘 그런 느낌을 배가시켰다.
막 죽은 시체와 같이 창백한 인상의 그녀였지만 같은 여자인 소녀가 보기에도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마치 사람답지 않은 아름다움에 소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누..누구세요?"
여인은 대답 대신 시를 계속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그 눈물을 잊었지만
마침내 눈물은 제 주인을 찾아갔구나
오랜 세월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했지만
마침내 사람들은 죽은 그녀를 잊겠구나...

여인은 시를 끝내자마자 한 손을 내밀었다.
마치 백옥과도 같은 그 손에는 나머지 한 짝의 귀걸이가 놓여있었다.
귀걸이를 본 소녀는 당황하며 겨우겨우 대답했다.
"아... 귀걸이 주인이시군요... 많이 찾으셨겠어요..."
소녀는 아쉬워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귀걸이를 건네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네꺼야."
"네?"
예상 못한 대답에 소녀는 다시한번 당황했고 여인은 소녀가 내민 손에 나머지 한 짝의 귀걸이를 놓아주었다.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를 두고 여인은 스르륵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소녀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머물던 여관으로 돌아왔다.

바느질에 유난히 소질이 있던 소녀는 마리아노플에서 바느질장이로써 성공하리라는 꿈을 품고 혼자서 이곳까지 왔지만 그녀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가게 주인들 때문에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옷을 만드는 동안은 여관에서 머물기로 한 것이다.
한 쌍의 아름다운 사파이어 귀걸이가 생기자 소녀는 정말로 기뻐했다.
누가 봐도 감탄할만한 정밀하게 조각된 작고 넓은 금반지와 거기에 부착된 마름모꼴로 조각된 최고급 사파이어는 어느 금은방에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그저 화려한 귀걸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소녀는 이 귀걸이에 어울릴 만한 옷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 밤 늦게까지 소녀는 열심히 바느질을 하여 마침내 만들던 옷을 완성했다.
소녀는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낮에 그 여인을 만났다.
나는 단번에 그 여인을 알아보고 말했다.
"아, 그 귀걸이는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쓸게요."
그녀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건 내가 가진 장신구 중 가장 좋아했던거야. 너도 그걸 가장 좋아하기를 바라."
"네, 저도 이 귀걸이가 가장 좋아요."
"그래, 너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마치 나처럼."
나는 여인의 대답에 뜻 모를 위화감을 느꼈지만 별일 아니겠지 하고 넘겼다.
"네,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래... 정말 잘 어울려... 드디어....... ....... ........"
그녀는 마지막 말을 혼잣말하듯 힘을 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여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네?"

대답과 동시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을 보니 아침식사를 하기는 살짝 이른 새벽이었다.
나는 참 희한한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개운한 기분으로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 속의 나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어라...?
내가 언제 귀걸이를 했더라...
바느질 중에 한번 해 보고 잊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는 머리를 대충 넘기고 아침단장을 시작했다.



"저기 좀 봐. 저런 여자가 왜 이런데 있지?"
"차림새나 귀걸이를 보니 어중간한 귀족 같지는 않은데?"
"혹시 까다로운 부모님 몰래 도망쳐나온거 아냐? 왜, 높은 귀족가 영예중에는 결혼할 때까지 집이랑 파티장 외에 다른 곳에는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사람도 있다잖아. 이런 거리가 궁금해서 뛰쳐나온거 아냐?"
고급품은 하나도 팔지 않는, 평민들과 여행자들만이 찾는 시장거리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주변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은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가지런히 정돈된 밝은 금발머리를 어깨 너머까지 늘어뜨리고 이음매마다 금색 장식을 댄 발목까지 오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엄지손가락만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소녀는 웅성거리면서 자기를 슬슬 비껴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속으로 혼자 웃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다시한번 떠올랐다.
'사람들은 언제나 겉모습만으로 상대방을 쉽게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항상 외모를 적절히 가꾸고 다녀야 한단다.'
도시로 나가는 것을 걱정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외모를 ‘단정히’ 가꾸는 게 아니라 ‘적절히’ 가꾸라고 하셨다. 그 말은 외모만 화려하고 예쁘게 잘 가꾸면 누구나 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이르자 소녀는 자신이 만들던 옷을 입고 예쁘게 단장하여 귀족인 체 하며 거리를 다니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이었다.
귀걸이와 드레스의 조화는 마치 주문제작한 한 세트마냥 너무나도 어울렸다. 그 덕에 소녀는 한층 더 귀족스러운 자태를 뽐낼 수 있었다.
"저 화려한 장식들을 만드느라 바느질 아가씨들이 고생 꽤나 했겠는걸?"
"저 귀걸이는 어떻고, 저것도 장난 아니게 비싸보이는데?"
"어머, 저 새하얀 비단 좀 봐봐 귀족들은 모두 저런 옷을 입고 다니나봐"
사실 소녀의 옷은 비단 중에서도 질이 나쁜 축에 속해서 약간 좋은 무명천과 비슷한 가격의 옷감을 사용했지만 저들 중 그런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녀가 의류상점이 몰려있는 곳을 일부러 피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사실 옷감은 나쁜 편이지만 은색 실로 보일 듯 말듯하게 수놓아진 무수한 자수들과 간결하면서도 정교한 장식들은 귀족들의 옷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할법한 솜씨였다.

그리고 그런 자수를 감상하는데 정신이 팔린 한 청년이 있었다.
오늘은 그의 가문치고는 조금 수수한 옷을 입었지만 그는 어느 공작가의 차남이었다.
평소 연극을 즐겼고 최근에는 각종 의복을 디자인하는데 맛이 들린 청년으로써는 갑자기 등장한 본적 없는 화려한 디자인의 드레스와 거기에 꼭 맞는 보석 귀걸이의 한 쌍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옷도 옷이지만 귀걸이의 최고급 사파이어와 멀리서 봐도 화려하게 조각된 황금장식은 보통의 물건이 아니었다.
값이 싼 원단을 사용한 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소녀가 점점 멀어져가자 청년은 따라가서 소녀를 불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뒤를 돌아본 소녀는 어느 귀족가의 도련님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죠?"
"실례지만 그 옷을 어디서 맞추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마리아노플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싼 옷을 만들기로 유명한 가게인 '하얀 십자수'에는 가장 뛰어난 바느질장이의 칭호인 침선장으로 불리는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지금 침선장에게는 수제자가 한명 있는데 다음 침선장은 그녀가 될 거라는 소문은 이미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갑자기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새로 온 녀석, 그렇게 실력이 좋다며?"
"침선장님도 그녀석이 만들었다는 옷을 보고 엄청나게 놀랐다지?"
"평소 아무리 화려한 옷을 봐도 칭찬은커녕 독설만 늘어놓으시던 분이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니 당연히 놀라신 거겠지. 심지어 그 자리에서 바로 침선제자로 받아들였다며?"
"그런 경쟁자가 생겼으니 우리 아레네는 침선장자리 뺏기는 거 아냐?"
아레네라 불린 소녀는 원래 침선장의 하나뿐인 침선제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웬 귀족차림의 소녀가 7년 동안 고생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게 아닌가!
당연히 아레네는 화가 났고 소녀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침선제자는 물론 침선장의 자리까지 빼앗기 게 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난 나머지 소녀의 자수 따위는 아레네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침선제자가 된 소녀는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주운 이 귀걸이가 행운을 가져다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소녀는 허름한 옷차림이라도 외출할 때는 몸 어딘가에 반드시 귀걸이를 지니고 다녔고, 이따금씩 화려한 옷을 입을 때면 반드시 귀에 걸었다.
그 때문에 소녀에게는 ‘사파이어 손가락’ 이라는 별명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소녀가 침선제자가 된지 6개월이 지났다.
소녀는 이미 침선장의 실력을 뛰어넘었고 침선장은 이제 소녀에게 침선장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이러니 당연히 아레네는 소문은 물론 어디에서나 2인자라는 말을 들었고 사람들은 소녀를 이미 침선장이라도 된 마냥 대우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아레네는 어떻게든 소녀를 뛰어넘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바느질을 배웠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소녀와의 실력차가 벌어지기만 했다.
때로는 소녀가 만든 옷을 난도질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소녀는 더 화려한 옷으로 고쳐서 가져왔다.
아레네는 그런 천재소녀를 갈수록 심하게 미워하기만 했다.
이정도가 되자 소녀는 물론 다른 사람들 까지도 아레네가 소녀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다들 단순히 바느질 아가씨들의 흔한 질투심이겠거니 하고 모른 체 했다.
어떻게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마침내 아레네는 1개월 전부터 계획해온 수를 쓰기로 결정했다.
가랑돌 평원의 바다생물에게서 추출해낸 독을 사용하는 것이다.
아레네는 소녀가 항상 사용하는 5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바늘 끝에 독을 묻혔다.
이제 내일 어떻게든 소녀가 실수로 바늘로 자신의 손을 찌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 한적한 카페 안 금발머리를 올려 묶은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한구석에 앉아 십자수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수를 놓는 손이 심하게 떨려 수는 엉망이었다.
"야 저기 있는 저 여자 좀 봐봐. 사파이어 손가락 아니야?"
"에이 설마... 저렇게 손을 떠는데 어떻게 그런 자수를 놓아?"
소녀는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십자수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레네의 계획은 성공했다.
소녀가 아주 정교한 용무늬 자수를 위해 독이 묻은 바늘을 집어 들고 한 땀 뜨려는 순간, 바로 옆에 앉아있던 아레네는 마치 실수인척 하며 바늘이 빠져나오려던 천을 홱 잡아당긴 것이다.
바늘은 그대로 소녀의 손을 찔렀다.
다음날 아침부터 소녀는 손 감각이 무뎌지면서 서서히 손을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다음날부터 소녀는 더 이상 바늘을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결국 호전될 수는 있지만 완치는 불가능 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소녀는 자신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몰랐어? 그 애 갑자기 수전증 때문에 이제 바느질을 못하게 됐대."
"정말이야?"
"쯧쯧.. 그렇게 바느질만 해대더니 결국 저렇게 되었구만..."
"쉿... 조용히 좀 해! 그러다 들을라...."
사실 조금이나마 수전증을 줄여보고자 시작한 마법치료의 부작용으로 소녀는 청력마저 잃어갔다.
그래서 카페사람들이 하는 말은 이미 들을 수 없게 된지 오래다.
몇 안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자신들만의 수다에 빠졌다.
바에 있던 카페 주인은 손님이 없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 소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멈췄다.
자신에게 나머지 귀걸이를 준 바로 그 여인이 눈앞에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소녀가 본 여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귀걸이가 말하는 구나
그동안 재미있었다고
귀걸이가 비웃는 구나
소문은 사실이었다고
귀걸이가 말하는 구나
이제 너와도 이별이라고
귀걸이가 명령하는 구나
너를 내게서 떼어놓으라고
귀걸이가 말하는 구나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고

그때, 소녀는 꿈속에서 여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그래, 정말 잘 어울려. 드디어 너의 주인을 정한거니?"
소녀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소녀의 오른쪽 주머니에서는 귀걸이 한 짝이 스르륵 빠져나와 의자 틈새로 들어갔다.

“벌써 천년... 아홉 명 째야...”
여인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침선장이 되기로 했지만 손을 잃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손을 잃었다는 것에는 다양한 추측이 있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황금평원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때 등 뒤에서 흰 비단옷을 입은 금발 여인이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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