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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ser

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왕자비로 내정되었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솔즈리드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프러포즈를 받았나요?”


그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청량해서 소녀는 놀라는 것도 그만 잊었다. 귓가에 부드럽게 가라앉는 여성의 목소리에 소녀는 시선을 돌려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깨끗한 얼굴에 인상이었다. 제 고향인 솔즈리드 마을에서는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었던 미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녀의 마음이 한껏 들떴다.

마리아노플에 가거든 사람들을 조심하렴.

저에게 몇 번을 당부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이 순간 떠올리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저의 시선을 앗아가는 여성의 얼굴에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잊고 그 얼굴을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여서 사과를 할 수도, 그렇다고 무례를 저질러놓고 뻔뻔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어서 소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예쁜 귀걸이네요.”


뒷걸음질을 한 발짝 내딛자마자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녀는 다시 한 번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마주 한 여성의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제야 소녀는 절로 제 두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곧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제 모든 행동을 봤던 걸까. 도둑질을 했다고 저를 경비병에게 데려가면 어쩌나. 그러나 여성의 얼굴에는 전혀 저를 강압적으로 끌고 가려 한다는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페어가 아니죠?”
“저어….”
“아아.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예쁜 귀걸이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궁금해졌어요.”


단순히 예쁜 귀걸이어서 궁금하다는 말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의 말이더라도 쉽게 믿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제 두려움이 괜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페어가 아닌 귀걸이는 상당히 어색하네요.”
“저기요.”
“그리고 대부분 프러포즈는 반지로 하죠.”
“왜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러포즈로 받은 귀걸이는 아닙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전신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누군가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것 때문에 이런 수치를 겪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분명 이 귀걸이에는 주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실 처음부터 주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돌려 줄 생각 따위가 들어 설 시간조차 없을 만큼 귀걸이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귀걸이로 인해 이런 수치를 겪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자 소녀는 저도 모르게 조금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계시네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경멸을 드러냈다. 그 경멸은 오히려 맹목적이어서 소녀는 감탄스러웠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이 저에게 맹목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는 지 알 수 없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당신은.”
“…네?”
“그 전부터 지금까지도. 도대체가.”
“날 알고 있어요?”
“당연하게도.”


소녀는 아무리 제 기억을 되짚어 봐도 제 고향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제가 사는 시골 마을은 좁은 만큼 마을 사람들끼리는 모두 이웃이라고 불렸다. 마리아노플처럼 큰 대도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을 단 한 번이라도 마주했었다면 기억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성은 저를 안다고 하는 것일까.


“어떻게 절 아시죠? 전 당신을 모르는데요.”


그러자 순식간에 여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 순간에도 소녀는 생각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미인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져도 여전히 아름다움에 빛이 나는구나. 그 얼굴에 매료되어 넋이 나가 있는 그 찰나였다. 그 순간 소녀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진실을 알게 되는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도, 그것을 수용하여 버텨 낼 준비도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소녀는 알게 되었다. 그 여성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날카로웠고 맹렬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제니아. 당신의 아버지가 몰락시킨 가문 귀족의 여식입니다.”
“…네?”
“정확히는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할 수밖에 없겠군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자라왔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어요. 그 증표로 당신은 그 귀걸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죠. 난 당신을 지금까지 지켜봤습니다. 솔즈리드에서 우리는 꽤 사이가 좋은 친구로 이틀을 보낸 적도 있었죠. 그때 난 생각했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니 난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그 이틀 동안 내게 보여준 당신의 친절은 내 마음을 움직였었죠.”


여성의 입에서 거기까지의 진실이 쏟아지자 소녀는 기억해냈다. 몇 년 전, 성년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제 마을에 여행객들이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솔즈리드는 작은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풍경으로 꽤 많은 여행객들이 날이 밝은 계절마다 발걸음을 했다. 그리고 홀로 그 마을을 찾았던 여성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저와 나이가 비슷했으며 이틀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이틀간의 친분은 소녀의 기억에 오래 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솔즈리드에는 매년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찾아왔고 모두 그녀와 비슷비슷한 친분을 유지했다가 곧 이별했다. 그러니 소녀의 기억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이어도 잊혀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죠. 그 여행으로부터 마리아노플로 돌아온 뒤 내가 알지 못했던 진실들을 알게 되면서 난 당신을 다시 한 번 생각했고,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나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만약 당신이 날 다시 만날 때까지 진실을 알게 되어있다면, 그래서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사죄를 한다면 난 당신을, 아니 당신의 어머니를 용서하겠다고 결심했죠.”


소녀는 도저히 제니아라는 이름의 여성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단순히 카페에서 주운, 짝이 없는 귀걸이 때문에 이런 말들을 듣고 있어야만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니아는 전혀 멈출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날 알아보지 못하고 그 귀걸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는군요.”
“무슨 말이죠? 무슨 뜻이죠? 난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우리 어머니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거죠? 돌아가신지 십 년도 넘어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죠? 난 전혀 알지 못해요. 그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말 해 주세요. 알게 해줘요.”
“이제야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나에겐, 그리고 우리 가문에게는 3년의 시간이 있었죠. 그 시간동안 진실을 밝힐 수만 있었어도 우리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그러나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에게 진실을 알려주지도, 그리고 우리에게 진실을 밝힐 기회를 주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진실을 알 기회를 줄 수 없어요. 당신의 친절을 기억하지만, 그리고 그런 부모 밑에서 당신처럼 순수한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지만. 내가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에요.”


여전히 해가 밝은 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 도대체 저가 주운 귀걸이의 진실은 무엇이기에 저를 이런 소용돌이에 처하게 한단 말인가. 소녀는 알 수 없었다. 이해 할 수도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갖춰져 있지 않은 채 마주한 반쪽짜리 진실은 반쪽짜리 귀걸이와도 같았다. 무엇이든 사죄를 하고 싶어도 할 수조차 없었다. 진실을 알 수 없으니 무엇을 사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소녀의 손에 제니아는 꼭 모양이 같은 귀걸이 나머지 한쪽을 쥐어주었다. 그 손길은 다정해서 소녀는 제가 선물을 받고 있다고 착각 할 정도였다. 그리고 제니아는 아름다운 미소를 다시 한 번 얼굴에 얹고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금세 소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소녀는 불안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곧 커다란 재앙이 닥칠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재앙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인할 것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아름답게 보이기만 하는 귀걸이가 제 손에 이제는 완전한 짝을 갖추어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곧 그 귀걸이를 손에 꾹 쥔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 무엇도 감히 예감할 수 없어 결국엔 사고를 포기했다. 만일 이 귀걸이가 모든 진실의 열쇠라면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홀로 남겨진 자리. 아름다운 귀걸이 한 쌍. 모든 진실의 시작. 진실을 알고자 했지만 이미 진실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제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리고 소녀는 곧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손에 진실의 씨앗인 귀걸이를 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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