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3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2-28 10:13 | 조회 8498




이스밀은 2년 동안 파비트라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파비트라가 돌아오는 날 시작할 일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바로 두 번째 반역이었다.

 

탑의 도시에는 2천 명의 상비 군대가 있었다. 나디르가 그들을 이끌었다. 나디르는 이스밀이 파비트라를 데려오기 위해 황궁에 침투할 때도 함께했던, 이스밀의 심복이자 친우였다.

유사시 모병 가능한 3천여 명의 시민 군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합친다 해도 황도와 정면대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밀리에 행군해야 할 거리도 너무 멀어 사실상 동원하기 힘든 군대였다.

예전 같은 기습도 불가능했다. 베난 황제는 누로날 황제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삼은 듯 황도 밖으로는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힘을 모아야 했다. 이스밀은 오스테라 총독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오스테라는 본래 서쪽 대륙과의 교역으로 번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아라야니 1세 시절, 갑자기 교역을 금지당한 후 비밀리에 이면 교역을 계속하다가 발각당해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스테라 총독은 지원을 하는 대가로 교역권을 주겠다는 이스밀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지원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마치 예전에 이스밀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밀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스테라가 제공한 황금은 황도의 고관들을 포섭하는 데 제격이었다. 그들의 비호를 얻자 은밀히 용병을 모아 길렀다. 황도 남쪽의 아므르타라는 소도시는 그런 일에 딱 맞는 장소였다.

 

아므르타는 검은 사막의 초입에 위치한 남방 무역의 중심지였다. 죽처럼 끓는다는 검은 사막의 더위와 ‘용의 뒤척임’이라고도 불리는 지진을 두려워해 아예 접근도 않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선입견과 달리 아므르타는 꽤 견딜 만한 기후였다.

그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아므르타를 세우고 지배해 온 자들이 나라야나들이기 때문이었다. 아므르타에서 시작되는 무역로 ‘용의 길’을 독점해 온 나라야나들은 온 대륙의 상인들이 아므르타로 몰려들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스밀이 아므르타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는 파비트라가 데려온 호위무관 알키미 덕택이었다. 아므르타 태생인 알키미는 제국군에 지원했지만 출신지 때문에 차별을 받다가 오히려 그 덕택에 어린 파비트라 황녀의 호위병으로 뽑혔다.

파비트라가 황궁에 침입한 이스밀을 따라갈 때 알키미는 황녀의 뜻을 받들어 떠나도록 도와준 뒤 자취를 감췄다. 이후 황궁으로 돌아온 파비트라는 다시 알키미를 찾았고, 황후의 호위무관이 된 그는 파비트라가 두 번째로 떠날 때 이번에는 직접 따라나섰다. 그리고 방랑 생활을 하는 2년 동안 사실상 파비트라의 생존을 책임졌다.

 

아므르타를 거점으로 삼아 군대를 기르면서 나디르는 탑의 도시의 군대를 조금씩 아므르타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그런 음모를 눈치 챈 자가 있었다. 어느 날 날아든 편지를 읽은 나디르는 일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이스밀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다.

편지에는 ‘귀인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말들이 검은 물을 마셔 그토록 기름지다고 들었습니다. 말의 안장은 물론 보라색이겠지요? 한번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내온 자는 베로에 출신의 귀족, 가로말의 아들인 열아홉 살의 류이진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그는 귀족이라는 것만 빼면 아무런 관직도 없는 한량이었다. 그렇기에 그간 포섭은커녕 접촉 대상에도 들어 있지 않던 자였다.

그런 자가 이스밀이 하려는 일을 간파하고 있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검은 사막에는 종종 먹을 수 없는 검은 물줄기가 흘러나와 개천을 이루곤 했다. 보라색의 열대수련은 이스밀의 가문의 문장이었다.

 

이스밀이 달려와 류이진을 만나기까지는 두 달이나 걸렸다. 그 전에 나디르가 먼저 만나려 했지만 류이진이 거절했다. 게다가 만나는 장소는 제멋대로 아므르타로 지정했다.

이스밀도 나름대로 류이진이 두 달이나 기다려준 것으로 보아 황제에게 고할 작정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포섭해 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만약 되지 않으면 류이진을 인질로 잡고 바로 거병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아므르타에서 만난 류이진은 한 번 더 이스밀을 놀라게 했다. 류이진은 황제의 성격이며 습관, 건강 상태, 거둥 일정, 근위대의 약점 등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한편이 될 법한 자들, 그렇지 않은 자들, 배신할 자들을 일일이 지적한 인명록도 보여주었다. 심지어 거사 날짜까지 제멋대로 정해 왔다.

이스밀이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류이진은 이 날짜에 거병하지 않으려면 그냥 황제 편으로 돌아서겠다고 해서 이스밀을 한층 당황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그 나이답게 어린애 같은 면모도 있었지만 류이진은 빼어난 지략가였다. 대화를 해볼수록 이스밀도 그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또한 정보 운용 능력이 엄청났는데 그건 류이진뿐 아니라 그의 가문 자체가 그렇다고 했다. 베로에 사람은 예로부터 첩자를 쓰는 데 능숙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그리고 류이진이 이스밀의 편에 합류하기로 한 것도 나름 정보를 수집한 끝에 내린 전략적인 결정임을 알았다. 비록 천재적이긴 해도 류이진은 충성심이 강한 유형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날카롭긴 하되 내 편도 찌를 수 있는 칼이었지만 이스밀은 류이진을 받아들였다. 다만 거사 날짜만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류이진은 뭔가 문제만 생기면 거사 날짜를 바꿔서 그렇다고 생떼를 써서 이스밀의 속을 긁어댔다.

나중에 파비트라를 만났을 때는 어린 이샤마를 보며 ‘황자께서 황녀였어야 제가 부마가 되는 건데’라고 해서 파비트라의 넋을 빼놓기도 했다.

 

베난 황제는 스스로 악수를 두는 중이었다. 성년이 된 누로날 황제의 아들 다할을 의식한 나머지 정무조차 뒷전으로 돌린 채 황제 우상화에 몰두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새 황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억지 누명을 씌워 다할을 황도 밖으로 추방했는데 반대 여론이 들끓자 이름난 가문 출신들을 반역자로 몰아 처형했다. 다할이 처형을 피해 달아나자 황족인 그의 목에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이스밀은 그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용병대장의 이름을 가장해서 다할을 붙잡았다면서 황도로 압송하겠다고 고했다. 베난 황제가 반색하여 목을 빼고 기다리는 가운데 황도 근처에 이르러 갑자기 다할을 놓쳤다고 하며 북문으로 달아났다고 알렸다.

황제의 엄명으로 황도 수비군이 모조리 북문 밖으로 나갔을 때 나디르가 이끄는 군대가 남문의 방어를 쉽사리 깨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황궁을 포위했다. 시종을 가장하고 있던 류이진의 첩자들은 때맞춰 황제를 억류했다.

 

파비트라는 원로원을 소집하여 베난 황제가 페리사 선황제를 독살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페리사가 피를 토한 옷을 보였다. 페리사가 갑자기 죽었을 때 곁에 있던 파비트라가 미래를 생각해 챙겨 두었던 것이었다.

핏자국 묻은 천을 씹어 먹은 염소들이 쓰러져 죽자 독살 혐의는 분명해졌다. 이미 당시에도 페리사의 죽음에 의혹이 있었던 데다, 베난이 페리사가 죽은 직후 파비트라를 내치고 새 황후를 맞았던 행동 때문에 더 이상의 증명은 필요치 않았다.

 

베난은 마지막 발악으로 자신이 파비트라를 내쫓으려 했던 것은 파비트라가 이스밀과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이며 이샤마도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폭로했다.

파비트라는 살기 위해 제 자식조차 부인하는 자가 잠시나마 남편이었다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이스밀이 미리 말해둔 대로였다.

 

파비트라는 황녀이므로 황제가 될 자격이 있었지만 그 후계자는 반드시 아버지도 황족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이샤마는 이스밀이 아닌 베난의 아들이어야만 했다. 그랬기에 페리사도 예전에 파비트라와 베난의 결혼을 강행했던 것이었다.

과거 자식이 없었을 때는 파비트라가 이스밀과 결혼하고 다른 황족을 후계자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이샤마가 있었다. 둘 다 사랑하는 아들이 장차 황제가 되기를 원했다.

비밀을 아는 단 한 사람, 페리사 선황제는 죽고 없었다.

 

만약 이샤마가 베난의 아들이 아님이 밝혀진다면 황위는 다할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지금은 다할이 숨어있지만 베난이 폐위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나타날 게 뻔했다.

물론 원로원의 추인을 포기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력 가문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누구라도 이름뿐인 황제에 불과했다. 심지어 시작부터 평판을 잃으면 앞으로의 국정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 뻔했다.

며칠 동안의 심의 끝에 원로원은 베난을 폐위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할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원로원의 지지를 얻은 파비트라는 황제로 즉위했다. 베난은 비록 선황제를 독살한 죄가 있었지만 잠시나마 황제였으므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처형을 대신했다.

 

파비트라는 가장 먼저 이샤마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이스밀과 정식 부부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관직을 줄 수도, 가까이 둘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샤마가 이스밀의 아들임이 밝혀지고 말 것이었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벌써부터 파비트라와 결혼할 황족을 고르는 중이었다.

 

파비트라를 위해 늘 그림자 노릇을 자처했던 이스밀은 이제 정말로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처지였다.






'루키우스의 기록'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본 콘텐트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댓글 8
  • Icart @에페리움 | 37레벨 | 포식자 | 누이안
    불쌍한 이스밀.. ㅠㅠ 그래서 게임에서도 파비트라 여제 근처에 이스밀은 보이지 않는가보군요. 전에 누군가 그러던데..
    2014-02-28 13:12
  • 백기사김코드 @에안나 | 52레벨 | 마법 근위관 | 하리하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14-02-28 16:24
  • 아테니엘 @올로 | 53레벨 | 그림자 검 | 페레
    ㅠㅠㅠㅠㅠㅠㅠㅠㅠ 헌신했더니 헌신짝....
    2014-02-28 17:40
  • 루어매니아 @메어 | 52레벨 | 길잡이 | 페레
    헌신했더니 헌신짝 ㅋㅋㅋㅋ
    2014-02-28 19:23
  • 뚜쉬뚜쉬 @루키우스 | 51레벨 | 흑마술사 | 엘프
    으아니 이 무슨 사랑과 전쟁이란 말이오....ㅠㅠ
    2014-03-01 12:10
  • 비나 @키프로사 | 36레벨 | 신성 노래꾼 | 하리하란
    슬픈 와중에 류이진 귀여워... 류이진ㅋㅋ큐ㅠㅠㅠㅠㅠㅠ
    2014-03-09 18:21
  • 은담 @에안나 | 55레벨 | 사제 | 누이안
    ㅠㅠㅠㅠㅠ
    2014-03-15 01:40
  • 빅브로 @아란제브 | 55레벨 | 추적자 | 페레
    아으.. 이스밀 ㅠㅠㅠ
    2014-06-07 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