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6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3-21 10:07 | 조회 7657





그러자 파비트라는 웃었다. 류이진은 웃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처럼 안 하느니만 못한 이야기를 꺼낸 뒤에 파비트라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눈빛이었다.

 

그간 류이진에게 파비트라는 비록 황제였지만 동시에 이스밀의 아내에 불과한 존재였다. 파비트라가 가졌던 모든 것은 이스밀이 무에서 창조해냈다. 오직 혈통을 제외하고는. 수년간 격동의 중심에 서 있었건만 파비트라 개인의 자질이나 성품은 끼어들 기회도 없었다.

그랬기에 류이진조차도 파비트라가 어떤 사람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로서. 그리고 남편이 이뤄준 자리를 자신의 권리로 착각해 엉뚱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현명함은 갖춘 여자로서.

 

“이스밀이 떠나면서 옛 계약은 끝이 났어. 하지만 짐에게도 경이 필요해. 그러니 새 계약을 맺고 싶군. 물론 지금 경을 붙잡을 만한 조건을 내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다만 경에게도 당장 택하고픈 새 주군이 없다면 짐에게 석 달의 시간을 주면 어떠한가? 석 달 후에도 경을 잡을 만큼 짐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떠나더라도 막지 않겠다.

 

파비트라가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리라고 류이진도 조금쯤은 짐작했다. 다만 석 달은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그 사이에 파비트라가 황위를 되찾을 가망도, 최소한 전쟁 가능한 군대를 편성할 가망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파비트라가 경험이 적어서 섣불리 저런 기간을 정했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류이진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석 달만 버티면 배신자라는 비난을 듣지 않고 떠나도 좋다고 오히려 자비를 베푼 꼴이었다. 파비트라는 대체 석 달 동안 뭘 하려는 걸까?

 

류이진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스밀에 대한 마지막 도리로 석 달 동안은 충심으로 파비트라를 보좌해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짧은 기간이었다. 그는 기적을 믿지는 않았지만, 행운의 연못에 동전을 던질 정도의 마음은 있는 사람이었다.

 

파비트라는 탑의 도시를 버리고 동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비파 항구를 에돌아 북부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동안 시시각각 소식이 들려왔다. 파비트라 여제는 비파 항구에서 승하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비파 항구의 총독, 이스밀의 배신으로. 비파 항구는 스스로 이스밀을 처단했고, 새 황제의 자비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 백성이 금붙이를 바쳐 여제를 위한 황금 관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황태자 이샤마가 새 황제가 되었지만 즉위식은 여제의 유해를 운구한 뒤로 미뤄졌다. 새 황제가 어렸기에 다할이 섭정 자리를 차지했다.

 

다할은 제일 먼저 재상 메레디스를 어장(御葬) 준비 총책임자로 임명하여 국정에서 떼어놓았다. 메레디스는 파비트라 여제가 제국 순방을 떠나 있는 동안 국정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었다. 다할이 섭정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려면 메레디스를 밀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메레디스는 섭정의 명을 따랐지만 그 대신 알키미를 내각시무대신으로 임명해 이샤마 황제 곁에 붙어 있게 했다.

 

오스테라 총독은 혼란 틈에 번개같이 탑의 도시를 차지해 놓고는 반란군을 대신 진압했다던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눌러앉아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황도에서도 당장은 탑의 도시를 탈환할 겨를이 없었지만 황제의 붕어를 틈탄 오스테라의 배신을 불쾌하게 여기는 기류가 팽배했다.

그와 함께 수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오스테라의 배후에 사라졌던 황녀, 카타니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파비트라 일행은 고대의 숲 근처에 도달했다. 이 거대한 수림을 넘어가면 서쪽 대륙에서 건너왔다는 자들의 왕국, 이니스테르가 있었다.

몇 세대 전, 제국과 이니스테르는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초승달 왕좌가 개입하면서 승리도 패배도 없이 끝났다. 그 후 숲이 천연의 방벽 노릇을 했기에 이쪽 지역은 제국의 최북단으로 여겨졌다. 사실상 제국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정보력을 자랑해 온 류이진도 이쪽 지역에 대해 들은 거라고는 풍문뿐이었다.

 

뜻밖으로 파비트라는 이쪽의 지리를 잘 알았다. 페레들의 옛 땅으로 알려진 초원을 누비며 허허벌판에서 잘도 길을 찾아 어느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 속에는 마을이 숨어 있었다. 파비트라는 마을 입구에 이르러 한 사내와 대화를 나눴다. 그자는 곧 깜짝 놀라더니 안으로 달음질쳐 사라졌다.

잠시 후 모든 주민들이 파비트라를 보러 몰려나왔다. 대부분은 여제 앞에 꿇어 엎드렸지만 몇몇은 그러는 대신 반가워하며 특이한 인사 동작을 했다. 파비트라는 그들과 같은 인사 동작을 해 보였다. 마치 한패임을 확인하는 표시 같았다.

 

설명을 듣고 보니 이들은 오래 전, 파비트라가 베난 황제를 피해 이샤마를 데리고 황도를 탈출했을 때 2년간 함께 지낸 자들로서 정체는 마적들이었다. 당시 이스밀을 찾아갈 수 없어 방랑 생활을 택했던 파비트라는 우연히 이들과 조우하여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때 마적들이 파비트라 일행을 받아들인 것은 호위 무관 알키미 때문이었다. 마적들은 사나운 사내들이었지만 알키미는 그런 그들을 나무칼 쥐고 나온 어린애처럼 다루는 괴력의 전사였다. 마적단에는 당연히 그런 사내가 필요했다.

 

처음에 파비트라 모자는 알키미에게 딸린 식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파비트라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마적들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였다. 마적들처럼 입고 먹고, 똑같이 말 등에서 생활했다. 어려서부터 알키미에게 배워 오던 검술도 이즈음 일취월장했다.

살아오며 몇 번이나 익숙한 환경이 뒤집어지는 일을 겪어온 파비트라는 어디서든 쉽게 적응할 줄 알았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마적들은 살아남고자 분투하는 파비트라와 어린 이샤마를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었다. 2년이 흘러 이스밀을 만나러 떠난다고 하자 보내기를 아쉬워했을 정도였다.

 

파비트라는 황제가 된 후 그들에게 은혜를 갚았다. 마적들은 이제 농부가 되었다. 그들이 꾸려가는 영지는 파비트라가 내려 준 자치 봉토였다. 영주도 그들 중에서 뽑았다.

비록 다시 만나기는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늘 여제와 황태자의 소식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소식이 늦게 전해지는 곳이라 비파 항구에서 일어난 변고도 모르고 있던 그들은 파비트라의 이야기를 듣자 격분했다.

 

류이진은 한때 마적이었던 농부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2백 명 정도였다. 이걸로는 군대는커녕 황제의 호위대로도 부족했다. 전쟁에서도 쓸모 있는 부대인지는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류이진이 회의적인 기색임을 알아챈 파비트라는 과감한 작전을 말해주었다.

과감하다 못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작전이었지만 류이진은 그리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그 방법 외엔 없겠다’며 동의하고는 군대 편성에 들어갔다.

 

농부들은 쟁기를 내던지고 마적으로 돌아왔다. 그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킨 류이진은 거창한 칭호로 자신을 소개한 뒤 마적들에게 ‘제국 수호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국 수호군은 다섯 색깔의 깃발로 나뉘고 각 깃발 아래 각각 9천 명의 병사가 속하며 9천 명을 세 개의 부대로 나눈다는 설명을 들은 마적들은 어이가 없었다. 뒤주 속의 쥐까지 세어도 한 부대의 절반이나 편성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류이진은 아랑곳 않고 각 부대를 이끌 부장들을 뽑고, 각 깃발을 지휘할 장군들도 뽑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고 나자 각 부대에는 대략 열 명 정도씩 나눠 넣으니 알맞았다. 우스꽝스러운 편성이 끝나자 류이진이 말했다.

 

“그대들은 4 5천 대군의 선봉이다. 각자의 뒤에 몇 명이 있는지 세어보라. 1년간 황제 폐하와 제국을 지켜낸다면 그대들 뒤에 4 5천 명이 나타나 있을 것을 약속한다. 그날, 그대들은 그들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무기와 갑옷, 말은 충분했다. 말 위에서 살아온 자들이었기에 모두가 뛰어난 기병이기도 했다. 류이진은 스스로 고안한 몇 가지 진을 가르치고 신호에 따라 진을 변경하는 법만 훈련하게 했다.

한 달 뒤, 2백 명의 제국 수호군이 첫 출정했다. 목표지는 비파 항구였다. 파비트라 여제와 총사령관 류이진, 그 아래 잠시 영주였다가 마적단 두령으로 돌아온 케사드가 홍군을, 달칸이 청군을, 무이곤이 녹군을, 하딤이 흑군을, 마지막으로 어부 아게우스가 백군을 맡았다.

 

그 무렵, 황도에서는 이샤마 황제가 파비트라와 이스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여제가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이스밀을 배신했기 때문에 분노한 이스밀이 여제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소문을 전해들은 메레디스는 예상했던 사태가 생각보다 빨리 닥쳐오고 있음을 느꼈다. 파비트라와 이스밀이 모두 죽은 지금 어린 황제에게는 피붙이도 하나 없었다. 정통성만 꺾어버리면 황위는 저절로 다할에게 굴러들어 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족들도 하나 둘 다할 쪽으로 돌아섰다. 그간 파비트라가 쌓아 온 것이 있는데 저렇듯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숨겨진 대가가 있다는 심증이 갔다. 그게 무엇일까?

 

얼마 후, 다할은 자신만만하게 유배 중인 베난을 찾아가 이샤마의 출생에 대해 증언을 끌어내려 했다. 그런데 베난의 태도가 뜻밖이었다. 베난은 이샤마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단언했다.

초조해진 다할이 유배를 풀어주고 선황제로 예우하겠다고 제안해 보았지만 베난은 비웃을 뿐이었다. ‘파비트라가 가증스러웠다면 다할 네놈은 구차스럽다. 어린애 뒤나 캐고 다니는 변변찮은 놈. 이제 하다하다 너 따위까지 황제가 된다면 제국도 끝물인 게지. 나보다 고작 몇 년 늦게 태어나 이 꼴이 됐다고 믿고 있다면 그 시차야말로 하늘이 네놈한테 보낸 경고란 걸 알아라.

 

다할이 베난을 찾아갔다가 돌아온 날 밤, 이샤마 황제의 침전에는 그곳에 예고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알키미였다.

알키미는 베난을 설득하지 못한 다할이 택할 길은 하나뿐이라고 판단했다. 결행은 빠를 것이다. 다할은 지금껏 너무 오래 기다렸기에 인내심은 바닥나고 눈조차 흐려졌다. 특히 베난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다할의 오랜 열등감을 자극했을 것이다.

 

다할은 오랫동안 베난이 자기 몫인 황위를 부당하게 채어갔다고 느껴왔다. 드디어 자기에게 승리가 돌아왔다고 굳게 믿은 순간 굴욕을 당했으니 분노는 사납게 분출될 것이 뻔했다. 베난은 페리사 선황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는데 다할이라고 못하겠는가?

알키미는 이샤마 황제에게 한 번 더 광야로 나가자고 주청했다. 과거 아기를 안은 파비트라를 지켜냈듯 그는 다시 한 번 어린 황제를 지켜낼 것이었다.

그러자 이샤마가 말했다.

 

“그러기 전에 하나만 먼저 묻자. 죽은 이스밀 총독이, 짐의 아버지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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