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16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8-20 09:22 | 조회 13309








이샤마와 알키미가 처음 흑곰 부족을 출발했을 때 동행한 페레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부족에서 출발한 전사들이 같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마주쳐 동행하자 어느새 무리는 백 명이 넘어갔다. 그 무리에서 페레가 아닌 사람은 이샤마와 알키미뿐이었다.

흑곰 부족 페레들이 두 사람을 부족의 손님이라고 소개하자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페레들은 많았다. 그들은 각 부족의 뛰어난 전사들이었기에 위풍당당한 데다 또한 사나웠다.

 

시선이 따가워지자 알키미는 페레들과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흑곰 부족이 말렸다. 아직은 길을 찾기 힘든 곳이니 로카 강이 나올 때까지는 함께 가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초원에서 길을 잃으면 살아남기 어렵기에 알키미는 일단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페레 전사들은 부족별로 번갈아 사냥을 나가 식량을 조달했다. 사냥에 방해가 될 터라 이샤마를 데려갈 수도 없어서 알키미는 주로 야영지에 남곤 했으나 항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라 결국 알키미는 이샤마를 두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혼자 남은 이샤마가 페레들과 함께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데 알키미와 함께 갔던 흑곰 부족 전사 바타미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불렀다. 알키미가 사냥 도중 동료를 구하려다가 크게 다쳤는데 임종을 지켜주어야 할지도 모르니 서두르라는 것이었다.

이샤마는 당황한 데다 상대가 흑곰 부족이었기에 의심 없이 바타미의 눈사자에 올랐다. 둘이 탄 눈사자가 초원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모닥불 가에 앉아 있던 또 다른 페레가 일어나더니 조용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한참 동안 달렸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냥을 이렇게 멀리 갔을 리 없었다. 이샤마가 자꾸 이것저것 물어도 바타미는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마침내 먼발치에서 불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사냥 나간 페레들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횃불이 많았다. 음모를 직감한 이샤마는 갑자기 눈사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바타미가 급히 눈사자를 돌리더니 뿔피리를 세 번 불었다. 그러자 횃불들 쪽에서 정체 모를 페레들이 일어나 달려오기 시작했다. 숨을 곳 하나 없는 초원에서 두 발로 뛰는 이샤마는 순식간에 따라잡혔다.

 

그때 이샤마가 달려가던 쪽에서 검은 눈사자를 탄 전사가 나타나더니 번개처럼 이샤마를 낚아채어 태웠다. 한 번 멈칫거리지도 않을 정도로 재빠른 솜씨였다.

이샤마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는 알키미도, 흑곰 부족도 아니었다. 그간 동행하긴 했어도 백여 명에 이르는 다른 종족 전사들의 얼굴을 구별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샤마가 물었다.

 

“누구세요?”

 

“왜? 알면 상이라도 주려고?”

 

상대는 놀랍게도 하리하란 공용어를 또렷하게 말했다. 이샤마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다시 물었다.

 

“알키미 님께서 보냈나요?”

 

“그 친구한테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그 말씀을 들으니 절 구하러 오신 건 맞군요.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아, 그래? 황도 근처에 성 하나쯤은 요구해도 되는 건가?”

 

“네……. ?”

 

말문이 막힌 이샤마가 어물거리고 있을 때 추적자들이 가까워졌다. 낯선 전사는 몸을 돌려 활을 쐈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러나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적들도 활을 쐈지만 이쪽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이샤마가 뒤를 흘끔거리다가 다시 앞을 보니 새로운 페레들이 보였다. 익숙한 흑곰 부족이었다. 이샤마를 태운 전사를 발견한 알키미가 맹렬히 달려오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친절한 얼간이라고나 할까?”

 

뒤이어 추적자들이 밀려왔다. 이샤마가 안전한 것을 본 알키미는 일단 추적자들을 물리치는 데 집중했다. 엄폐물 하나 없는 정면대결인 데다 비록 적의 숫자가 더 많았지만 분노한 알키미는 다가오는 적들을 짚 인형처럼 쓸어버렸다. 흑곰 부족도 목숨을 걸고 도왔다.

기세에 당황한 적들이 멈칫거리자 낯선 전사가 먼저 물러나며 뿔피리를 꺼내 불었다. 뿔피리의 사용법은 부족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퇴각 신호 정도는 다들 알아들었다. 모두 도망치기 시작하자 낯선 전사가 이죽거렸다.

 

“이따위 허허벌판에서 싸워서야 셈이 뻔하지. 한 명 남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면 뭘 해?”

 

일행이 페레들의 본대와 가까워지자 적들은 추적을 포기했다. 그제야 서로 대화할 겨를이 생겼다. 바타미가 배신했다는 것을 안 흑곰 부족은 크게 놀랐다. 이샤마가 누구이기에 바타미가 그런 행동을 했는가? 알키미가 선뜻 밝히지 못하자 낯선 전사가 끼어들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텐데. 내가 왜 여기 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배신자도 그놈 하나가 아닐걸. 그간 지켜보니까 언제 기회가 오나 하고 침 흘리는 놈들이 적어도 대여섯은 되던데. 페레 회합에 따라가면서 그런 비밀이 지켜질 줄 알았어? 아니, 페레 회합이 왜 열리는지는 알아? 오스테라 놈들이 황금으로 국을 끓여놓고 페레들을 부르고 있으니 그거 한 국자 더 먹고 싶은 놈들이 이미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바쳤지. 유목민이라고 의리 있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배신자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달콤한 것을 오래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파리가 꼬이는 거 아니겠나. 이제 헤어질 시각이야.”

 

알키미는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이 페레를 너무 믿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물론 흑곰 부족은 알키미에게 그간 신의를 다했다. 오늘의 싸움 때문에 흑곰 부족의 전사 셋이 죽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타미의 배신을 사과하며 그자는 다시는 부족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낯선 전사의 말이 아니라 해도 알키미 또한 이렇게 된 이상 페레들과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차피 배신자들이 이샤마의 정체를 안다면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준 자들에게 끝까지 정체를 숨기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알키미가 이샤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샤마가 말했다.

 

“나는 파비트라 여제 폐하의 아들, 이샤마 황태자입니다. 그동안 호의와 도움을 베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흑곰 부족은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흑곰 부족은 크게 놀랐지만, 황도로 돌아간 후 사례를 하겠다는 이샤마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부족의 손님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페레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오히려 바타미의 배신 때문에 저들이 빚을 졌다는 것이었다. 이샤마는 마지막까지도 페레들은 그에게 고귀함을 보여주었다며 웃었다.

심지어 흑곰 부족은 그들 일행이 안전한 곳까지 가도록 돕겠다고 했다. 페레 회합에는 그 후에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동행해서 초원의 띠까지 가기로 했다.

 

알키미가 낯선 전사의 이름을 물었지만 그자는 자신의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다며 밝히기를 꺼렸다. 그래도 뭐라도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며 계속 캐묻자연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 이름은 어느 모로 보나 페레답지 않았기에 알키미는 계속 되씹어 보다가 문득 그게의 친구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방 아므르타 출신인 알키미는 베로에 쪽에서 쓰는 동방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베로에의 연이라면, 다름 아닌 류이진의 가문이 아닌가?

 

비파 항구에 있는 류이진이 이곳까지 도움의 손길을 보낸 거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오스테라가 페레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을 알았다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류이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모가 왜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는지도 짐작이 갔다. 베로에 출신의 페레라면 유목민들이 가장 경멸하는 길들여진 페레, 즉 테미캣일 것이다. 테미캣이 초원의 페레들 앞에서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오스테라에서는 아르카디오가 알려준 계략을 받아들여 새로운 계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은밀히 꾸려진 사신단은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전 황제 베난을 찾아갔다.

베난은 오스테라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이 하려는 말을 다 알았다는 것처럼 비웃었다. 자신은 페리사 황제를 죽인 대역 죄인이므로 황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걸 잊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오스테라 사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리하랄라야의 황위 얘기겠지요. 그건 파비트라 여제에게 주어버리시고, 새 제국을 하나 더 세우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 콘텐트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댓글 9
  • 라프 @안탈론 | 55레벨 | 마법사 | 하리하란
    크으...으으으아아아.... 재밌따ㅜㅜ 배신과 음모는 좋은 향신료지요
    2014-08-20 11:10
  • 익양곡 @진 | 50레벨 | 기적술사 | 하리하란
    최근에 막 하리하랄야의 페허에 도착한지라 둘을 비교하며 읽으니 그 재미가 솔솔하군요
    그리고 2주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2014-08-20 11:13
  • 명석몽 @안탈론 | 51레벨 | 비전 사냥꾼 | 페레
    흥미진진!!! 건강조심하세요.
    2014-08-20 12:07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마법사 | 엘프
    뜬금 류이진 ㄷㄷ
    2014-08-20 12:26
  • 아레오 @키프로사 | 5레벨 | 야성의 초심자 | 엘프
    2주는 너무 길어요....ㅠㅠ
    2014-08-20 13:05
  • 맥콜 @크라켄 | 55레벨 | 자객 | 하리하란
    ㅠㅠ 재밌어
    2014-08-20 15:39
  • 에브니 @크라켄 | 51레벨 | 황혼의 지배자 | 엘프
    오호~ 괴뢰국을?
    2014-08-21 00:05
  • 루어매니아 @진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류이진 소름..
    2014-08-24 03:57
  • 찹쌀떡 @안탈론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류이진 : 낄낄
    2014-12-30 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