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 여신의 축복 | 조각난 연대기

2014-12-10 09:29 | 조회 6945






‘누이 여신의 축복이 누이안을 번성케 하리라.’
 



이 글귀는 오래 전 초승달 왕좌의 왕성에 자리한 누이 신전 주춧돌에 새겨져 있었다. 여기 이 말을 굳게 믿었던 한 가문의 이야기가 있다. 소번 가문. 양치기에서 시작했던 소번은 관대한 리들롯 왕의 시절에 남작으로 봉해져 가솔만 수백 명을 거느렸다. 왕과 남작은 좋은 사냥 친구였고 때로 함께 양을 몰기도 했다. 왕은 소번 남작만큼 뛰어난 양치기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늙은 소번 남작은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두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가문과 혼인했고 태어난 손자 손녀들이 마흔 명을 헤아렸다. 그 중 일곱이 빼어난 기사로 자라 리들롯 왕을 섬겼다. 셋은 여신의 신관이 되었다. 둘은 학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천여 마리에 이르는 양떼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축복받은 가문이었다.
소번 남작은 누이 여신의 축복이 가문을 일으켰다고 믿었다. 사람들도 여신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들롯 왕이 여든을 넘겨 왕비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자 초승달 왕좌에는 새 왕이 필요해졌다. 리들롯에게는 여섯 자식이 있었지만 왕의 자식이든 누구든 성 지하에 있는 ‘미로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다음 왕이 될 수 있었다. 보통은 왕이 이토록 노쇠해지기 전에 미로를 통과한 새 왕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랬다면 관대한 리들롯은 기꺼이 왕좌를 내주고 신성한 섬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어찌된 일인지 미로는 왕의 자식 둘을 포함해 일곱 명을 삼키고도 새 왕을 내놓지 않았다. 점차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시험에 도전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소번 남작은 충성스럽고 욕심 없는 자였다. 훌륭한 자손이 많았지만 가문에서 왕을 배출하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리들롯 왕의 상태가 알려지면서 ‘여신께서 왕좌를 버렸다’는 말이 나돌자 남작은 이대로 새 왕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관대했던 리들롯 폐하와 초승달 왕좌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느꼈다. 그는 먼저 기사가 된 일곱 손자들을 차례로 미로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관이 된 셋이 그 다음이었다. 그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왕가의 계보를 연구하는 학자였던 손자는 역사상 이런 일이 처음임을 알고서 두려워했다. 정말로 누이 여신은 초승달 왕좌를 버렸는가?
그도 결국 미로로 들여보내졌다. 마침내 미로는 소번 남작의 손자 열두 명을 삼켰다. 그즈음 남작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자식 셋을 모조리 잃은 며느리 하나는 목을 매었다. 그러나 남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누이 여신이 자기 가문을 축복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점점 나이 어린 손자들이 미로로 들어갔다. 아홉 살 난 시드 소번이 들어가고 나자 가문에는 더 이상 젊은이가 없었다.
그즈음 사람들은 미친 남작을 욕하며 가문이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고들 했다.
 


소번 남작은 멈추지 않았다. 나이든 아들 셋이 다시 미로에 도전했다. 둘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 뒤를 딸들이 이었다. 마침내 미로는 소번 가문의 사람 마흔 다섯 명을 삼켰다. 이제 가문에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작 자신이 미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소번 가문은 없다. 한때 짙푸른 언덕을 달리던 자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천여 마리의 양떼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소번 성은 지금도 텅 비어있다. 누구도 그 성에 들어가 살고자 하지 않는다. 으스스한 이야기만이 떠돌 뿐이다. 누군가는 성 앞에 검은 개들이 모여 있었는데 꼭 마흔 여섯 마리였다고 했다. 누군가는 목을 매어 죽은 며느리가 성 꼭대기에서 목 놓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미로로 들어간 사람들의 유령을 보았다는 자는 없다. 마치 영혼조차도 미로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처럼.
 


시력을 잃고, 썩어 들어가는 두 다리를 잘라내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 리들롯 왕이 왕비가 떠먹이는 죽을 열흘간 한 입도 삼키지 못하다가 굶어 죽었을 때 왕을 섬기던 시동 베레티스가 미로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다. 쉰다섯 번째 도전자였다.
베레티스 왕이 즉위하기까지 미로가 쉰네 명을 삼킨 일은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남았다. 그전까지 미로가 왕을 배출하기까지 희생되는 사람은 평균 세 명 남짓이었고, 첫 번째 도전자가 왕이 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양치기 소번을 남작으로 만든 것도, 마침내 한 명의 소번도 남지 않도록 한 것도 모두 여신의 사랑이었다고 속삭인다. 아마도 맞는 말일 것이다. 누이안들이 저들의 어머니, 저들의 심장, 저들의 생명으로 여기는 누이 여신이 지배하는 곳은 저승이며, 그녀는 곧 죽음의 여신인 까닭이다.
소번 가문은 여신의 땅에서 다시금 번성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의 검은 양이 검푸른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으리라.
 


소번 가문이 사라진 후 누군가가 주춧돌에 새겨진 글귀를 몇 글자 바꾸었다. 그 글귀가 지금까지 남아 전해온다.
 



‘누이 여신의 자비가 누이안을 삶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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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티치엘 @레비아탄 | 52레벨 | 마법사 | 하리하란
    누이 여신님 믿습니다 경험치 100% 돌려주세요..
    2014-12-10 12:53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은둔자 | 엘프
    일가족 몰살 ㄷㄷㄷㄷ
    2014-12-10 15:26
  • 명석몽 @안탈론 | 52레벨 | 유령 용사 | 페레
    뿌린 씨앗을 모두 걷어들이는 누이여신님.
    2014-12-10 16:02
  • 습격 @진 | 53레벨 | 그림자 검 | 하리하란
    킁킁 대규모업뎃의 스멜이?
    2014-12-11 00:35
  • 권동우 @안탈론 | 52레벨 | 그림자 검 | 페레
    누이 여신님 우리 아기에이지좀 살려주세요~
    2014-12-11 01:10
  • 사혼 @크라켄 | 55레벨 | 은둔자 | 하리하란
    재밌어!!!
    2014-12-12 11:23
  • 개복치 @루키우스 | 55레벨 | 추적자 | 엘프
    누이여신님 아키살려줏메..
    2014-12-17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