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굶주린 에온의 전설 | 조각난 연대기

2014-12-17 10:10 | 조회 7395








에온은 가장 불행한 엘프였다. 천 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기억술사들은 전한다. 에온이 마침내 패해 흙 위에 누웠을 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고. 그는 말했다고 한다. ‘기쁘다. 참담하게 길었던 이 삶을 마침내 끝내는구나.’



에온이 죽었을 때 그를 기릴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나 형제는 물론이고 그의 두 아내도, 그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도 모두 죽은 뒤였다.
에온은 엘프 사이에서 뿌리도 가지도 열매도 없는 나무토막과 같았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누구와 친교를 맺었으며, 누구를 사랑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죽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기억술사들을 제외하면.



에온의 삶을 이해하려면 엘프의 옛 일을 알 필요가 있다.
2천여 년 전, 엘프들은 원대륙에서 벌어진 재앙을 피해 새 대륙으로 건너왔다. 엘프의 심장이자 고향이었던 에노아 숲이 불타는 광경을 목격했던 그들은 이미 침착함을 잃은 상태였다. 그때 또 하나의 극복하기 힘든 사건이 그들을 덮쳤다.
기억술사들은 그 일을 두고 ‘엘프의 영혼이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새 땅에 왔지만 엘프들은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차라리 죽음을 맹렬히 바랐다. 그만큼 그들의 상처는 깊었다.
저승이야말로 고통을 잊을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주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죽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들은 명예를 중시했기에 실력이 비슷한 자들끼리 최선을 다해 싸운 후에 죽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것을 ‘정당한 결투’라고 불렀다.
수백 년 동안 그런 결투가 반복되자 새로 태어나는 자보다 죽어가는 자가 많아졌다. 엘프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원로들은 이대로라면 엘프가 멸종하고 말리라는 것을 알았다.



원로들은 대회의를 열어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기억술사들을 침묵시키는 것이었다.
기억술사는 수천 년에 걸친 엘프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신성한 임무를 짊어진 자들이었다. 또한 조상신과 소통하는 영매이기도 했다. 그들은 엘프에게 영광스러운 사건들뿐 아니라 치부도 남김없이 기억했지만 어떤 폭군도 그들의 입을 막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기억술사들은 원로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아니, 이해했다. 그들은 원대륙과 대이주에 대한 기억을 봉인했다. 대이주 후 5백여 년이 흐른 때의 일이었다.
새로 태어나는 엘프들은 옛 일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결투의 풍습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러나 당시 이미 성인이었던 엘프들의 기억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에온은 AE(대이주 이후) 3백 80년에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대이주 시대의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일찌감치 검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고작 마흔세 살에 첫 결투를 해서 상대를 죽였다. 인간으로 치면 고작 10세 무렵의 일이었다.



에온의 부모는 결투하여 서로를 동시에 죽였고, 기뻐하면서 죽어갔다. 에온은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이후 그는 성인식을 치르기까지 다섯 번이나 결투하여 모두 승리했다. 그때까지는 살아남는 일에도 의미가 있었다. 그에게는 서로 죽여주기로 약속한 소꿉동무 에올렌이 있었다.



둘 다 성인이 되자 에올렌은 결투를 하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에온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었다. 기다리다 지친 에올렌이 다른 상대를 찾겠다고 하고서야 에온은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결투를 하겠다고 답했다. 조건은,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엘프에게는 무척 드문 혼례잔치가 벌어졌고, 이튿날 두 사람은 숲속의 빈터에 섰다. 다섯 합 만에 에온의 검이 아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에온은 쓰러진 그녀의 검에 가슴을 갖다 대며 ‘제발, 제발! 혼자 가선 안 돼!’하고 외쳤으나 아내의 검은 그의 옷끈만을 끊고는 미끄러져 떨어졌다.



에온은 그 후 맹렬히 결투 상대를 찾아다녔다. 정당한 결투로 자신을 죽여줄, 다시 말해 구원해 줄 자를. 원로들의 결정이나 기억술사들의 침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에온의 재능은 재앙과도 같았다. 3백 살이 넘은 에온의 손에는 4백여 명을 죽인 명예로운, 그에게는 저주스러운 검만이 남았다. 엘프들은 누구도 결투로는 에온을 죽여줄 수 없으리라고 수군거렸다. 세월만이, 누구의 목숨이든 끊는 세월만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 즈음 엘프들은 옛 일을 잊었기에 더 이상 결투나 죽음을 원치 않았다. 에온은 결투를 원하는 최후의 엘프였다. 그러나 또한 엘프 중 가장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다.
원로들은 에온의 재능을 아깝게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에오카드’의 지휘자 역할을 맡겼다. 에오카드는 검무를 추며 제례를 이끄는 신관들이었다. 에오 씨족 출신의 뛰어난 전사들만이 에오카드가 될 수 있었다.



에온과 버금가는 전사가 없었으므로 에온은 아주 오래 에오카드를 이끌었다. 원로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한 까닭도 있었다. 에오카드를 떠나면 에온이 죽음을 택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2백 년이 흐르자 에온은 자신의 죽음이 에오카드에게 혼란을 줄까봐 걱정하기 시작했다.
에오 씨족 가운데 제오니스라는 소년이 에온을 따르며 한시도 검을 놓지 않자 에온은 그를 가르쳐 후계자로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자신은 다시 결투 상대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제오니스를 가르치면서 에온은 점점 더 소년을 아끼게 되었고 그에게 자신의 춤마저 물려주었다. 그러나 훌륭한 전사로 자란 제오니스는 모두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에온에게 도전했다.
제오니스를 죽인 에온은 지휘자 자리를 내놓고 엘프의 땅을 떠났다. 기억술사들은 그가 떠나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에온이 다른 종족들의 땅을 방랑하며 결투 상대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엘프들은 그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이제 결투의 풍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대부분은 에온이 왜 그런 기묘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에온은 누이안 여자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다. 타 종족과의 결혼도 엘프에게는 별난 일이었으나 에온에게 잔소리를 할 만한 자도 없었다. 그 즈음 에온은 엘프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다른 엘프들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4백 살을 넘기지 못했는데 에온은 이미 5백 살을 훌쩍 넘어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에온에게도 가족이 생기는 듯했으나 잠시였을 뿐이었다. 에온이 7백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아무도 살아있지 않았다.



에온은 엘프의 관습에 따라 결투를 거절하는 상대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고, 상대가 너무 실력이 낮은 경우에도 정중히 검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로 이름을 날리던 자들이 하나하나 죽어가면서 사람들은 그를 ‘피에 굶주린 에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강한 자의 앞에는 반드시 찾아와 결투를 청한다는 수백 살 먹은 엘프 전사.



이제 사람들은 에온을, 죽어간 자들의 이름을 쌓아 자신을 빛내려는 잔인한 자로만 여겼다. 그러나 에온은 명성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유명해지자 가만히 있어도 싸우자고 찾아오는 자들이 생겨나 만족했을 뿐이었다. 몇 백 년 동안 에온과의 결투에 응하지 않은 자는 명성이 바랬고, 응한자는 모두 죽었다.



어느 날 한 누이안 사내가 찾아와 결투를 청했다. 그는 우쭐대기 좋아하는 경박한 자였으나 에온이 목숨을 거둘 만큼의 실력은 있었다. 그것은 정당한 결투였다. 그러나 누이안은 엘프들의 ‘정당한 결투’가 무엇인지 몰랐다. 아니, 그때는 이미 엘프들도 몰랐다.
죽은 자는 달리엔 성주의 아들이었다.



달리엔 성의 기사들이 이끄는 군대가 에온의 집을 포위했다. 에온이 한때 가족과 함께 살았던, 그러나 이제는 홀로 사는 집이었다. 적의 수는 천 명을 헤아렸다.
오직 정당한 결투로 죽기만을 염원하며 견뎌낸 혹독한 세월이 무의미해질 지경에 이르자 에온은 절망하여 조상신들을 향해 ‘이런 운명을 주기 위해 천 년이나 기다리게 했는가!’하고 외쳤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자는 벼락을 일으켜 에온의 집 앞을 협곡으로 만들고 적들을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에온은 이토록 강한 마법사의 이름을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는 감사하는 대신 마법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이자라면 자신을 죽여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그자는 자신이 에온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온과 결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에온이 천 년 가까이 살았다는 말을 듣고 왔다. 그처럼 오래 살아온 자를 달리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자가 원하는 것은 오래전에 사라진 한 여인의 행방이었다. 에온은 자신과의 결투에 응해야만 말해주겠다고 답했다.



그자는 숙고하는 듯했다. ‘그대는 검사이고 나는 마법사이기에 우리는 정당한 결투를 할 수 없소. 검으로 싸운다면 그대가 이길 것이고, 마법으로 싸운다면 내가 이길 것이오. 그러니 둘 다에게 낯선 무기를 정해 1년 뒤에 만나도록 합시다. 그러면 정당한 승부가 될 거요.’



1년 뒤, 둘은 다시 만났다. 그들이 택한 무기는 왼손에 쥔 검이었다. 입회인들 앞에서 정당한 승부가 벌어졌고 상대도 치명상을 입었으나 에온이 먼저 쓰러졌다. 숨이 멎어가는 에온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상대가 귀를 갖다 대자 에온이 말했다. ‘가랑돌 평원으로. 흰 백작의 성으로.’



그자는 떠났다. 기억술사들은 에온을 죽인 자는 엘프도, 누이안도, 드워프도 아니었고, 몸에는 푸른 피가 흘렀으며 죽지 않는 몸을 가졌다고 전한다. 같은 상처를 입었으나 에온은 죽었고 그는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온은 자신이 이기든 지든 죽을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죽지 못할지도 몰랐기에. 훗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에온은 어려서 왼손잡이였다고 한다.



에온은 가장 고독한 엘프로 죽었다. 그가 죽어갈 때 그의 고통과 기쁨을 이해할 수 있었던 엘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엘프들은 에온을 가장 강대한 조상신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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