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귀환' 2화. | 조각난 연대기

2014-12-30 09:22 | 조회 6532










델피나드 외곽에 도착한 진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용의 등에서 내렸다. 용은 앞으로 진이 원할 때면 언제든 나타나리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진은 그런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용과 헤어진 진은 델피나드에 들어섰다.



델피나드는 여전히 번화했다. 예전처럼 온갖 땅에서 온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물결처럼 거리를 지나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듯 안심되는 풍경이었다.

동시에 묘하게 낯설기도 했다. 전에 드나들던 가게 몇 곳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눈에 익은 골목이 헐리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것도 마찬가지였다. 곧잘 약속장소로 삼던 나무 그늘이 사라지고 누군지 모를 사람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본 진은 잠시 서서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와 소지품의 위치를 뒤죽박죽 바꿔 놓기라도 한 듯한 불쾌감이었다.



그간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과민해졌으리라. 자신이 없더라도 델피나드의 밤낮은 굴러가기 마련이다. 생각을 떨치려고 빠르게 걷던 진은 문득 새로운 위화감을 깨달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는 사람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알아보고 흘끔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델피나드를 떠나기 전까지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벌어지던 일들이었다. 고작 계절 몇 번이 지났다고 모두 진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눈으로 다시 보니 거리의 어떤 것 하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낮이 아니라면 에아나드로 들어온 건 아닌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길을 잃기라도 한 듯, 비슷한 다른 도시로 들어오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이 기이하게 휘어 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그런 거리를 걸으면서도 진은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찾아냈다.


그러나 도서관에 들어가자 더욱 수상한 일이 벌어졌다. 알렉산데르 학파의 강의실로 찾아갔지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스승은 오래 전부터 학생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안내를 들었을 뿐이었다. 진을 알아보는 기색도 없는 학파의 조교를 붙들고 키프로사, 멜리사라, 에안나, 올로 등이 돌아왔는지 물어보았으나 그자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네요. 학파의 학생이 워낙 많으니까요. 가서 명부를 확인해 보시지요.”



그건 대답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명부를 확인해야 출결여부를 알 수 있는 평범한 학생들이 아니었다. 떠날 때 벌어졌던 소란을 벌써 모두 잊었단 말인가? 아니, 잊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떠난 것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완벽히 잊힐 수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진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모를 수 없을 이름을 꺼냈다.



“아란제브는 어떻습니까?”



안내자는 의아한 눈으로 진을 물끄러미 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아, 아직도 그분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군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그분이 계셨더라면 스승께서도 지금 같지는 않으실 텐데. 하지만 이백 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말씀하시는 분은 엘프 같지는 않은데 어찌 그 시절 일을 기억하시죠?”



이로써 조교는 아란제브도 모르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마도 이백 년 전에 동명이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키프로사도, 다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진은 맥이 빠졌다. 하지만 키프로사는 파문을 당했으니 어쩌면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타양이나 루키우스는 도서관과 관계없지 않은가? 진은 마지막으로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림자 매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했다.



집이 없었다.



숯으로 매가 그려져 있던 외벽도, 보초들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계단도 사라졌다. 매의 집이 있던 자리는 근처의 지저분한 집들까지 깨끗이 밀려 널찍한 광장으로 변해 있었다. 광장 중심에는 분수대가 속없이 명랑한 물줄기를 뿜고 있었다. 주변 또한 빈민가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시가지였다.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던 곳이지만 혹시라도 잘못 찾았나하고 주변 골목을 샅샅이 돌아보기까지 했다. 여기가 분명했다. 순찰대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진은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여기가 언제 이렇게 바뀌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라니요? 여기는 예전부터 쭉 광장이었어요.”


“여기에 뭐가 있었다고요? 집이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어갔다. 멀뚱거리며 대꾸하는 사람들의 멱살을 쥐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거짓말 말라고. 모두 짜고 이러는 것 다 알고 있다고. 누가 이런 짓을 꾸몄는지 모르지만 찾아내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그때 어느 노인이 진을 불러 세우더니 말했다.



“뭘 찾고 있나, 젊은이? 여기, 이 광장이 생긴 것은 이미 오십 년도 더 된 일이라네.”



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노인을 노려보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발 닿는 대로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머리를 싸쥐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원에서 오십 년을 보냈을 리 없었다. 그럼 뭐란 말인가. 술을 몇 잔 거푸 마시다가 도서관의 조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백 년 전의 인물 아란제브.



등에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진은 벌떡 일어나 옆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올해가 몇 년이냐고 물었다. 몇 마디 들어보니 이미 왕과 여왕도 바뀌어 있었다. 연호조차 바뀌어서 연대를 유추하기도 간단치 않았다. 진은 가까스로 힘을 짜내어 자신이 떠났던 해의 이름을 댔다. 누군가가 계산을 해 주었다. 그때로부터 거의 이백 년이나 지난 것이 아닌가!



진은 대담한 성미였는데도 순간 공포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이백 년이나 살아온 자신의 몸이 한 순간에 재로 변해 스러질 듯했다. 그 사이에 사라졌을 수많은 것들을 상상하자 목이 막혀오는 듯했다. 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겨우 술을 마셔 그날 밤을 넘겼다. 그러나 이튿날 일어나 델피나드를 배회하면 할수록 상실감과 두려움은 더욱 커져갔다. 혹시나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할 법한 사람들을 몇 명 수소문해 보았지만 몇 대 손까지 내려간 지금 찾아가서 소식을 물어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그림자 매의 집이 있던 광장으로 돌아온 진은 낯선 분수대에 기대어 서서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들과 자신은 한 곳에 있어선 안 될 사이였다. 저들이 진짜라면 자신은 유령이고, 자신이 진짜라면 저들은 환각이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 누가 자신을 이곳에 옮겨 놓았을까?

친구들은 어디 있을까? 진 혼자만이 이 낯선 세상에 남겨진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다른 사람들은 예전에 델피나드로 돌아와 살다가 죽어버렸는데 자신만이 정원을 헤매다가 너무 늦게 돌아와 이런 꼴이 된 것일까?

자신이 사라져버린 그들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정원 속에서 시간이 다르게 흘렀으리라는 추리를 해보긴 했다. 하지만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자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외로움은 한때 진을 지배했던 감정이었다. 그때 진은 그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누구와도 같은 세상에 살지 않았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자 어머니 에렉티나가 떠올랐다. 어머니도 이미 백여 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델피나드 외곽으로 나온 진은 용을 불렀다. 그리고 에페리움으로 데려다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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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막내호랑이 @진 | 55레벨 | 추적자 | 하리하란
    오옷!
    2014-12-30 11:24
  • Insub @레비아탄 | 37레벨 | 첩자 | 페레
    오옷!
    2014-12-30 12:11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환술사 | 엘프
    200년이었어 ㄷㄷ
    2014-12-30 15:53
  • 김쩝쩝 @에안나 | 50레벨 | 전사 | 누이안
    5
    2014-12-30 19:51
  • 서인나 @진 | 53레벨 | 사제 | 누이안
    용이 부른다고 냅다 달려오는 거였구나 .,..
    2014-12-30 20:47
  • 권동우 @안탈론 | 52레벨 | 그림자 검 | 페레
    에페리움.. 예감이 안좋아 . . .
    2014-12-30 23:43
  • 익양곡 @진 | 50레벨 | 흑마술사 | 하리하란
    그래서 시대 하나가 통째로 바귄거구나...
    가만, 그럼 안탈론 이양반 설마 200살먹은 양반이야?
    그리고 오키드나가 제일 불쌍해ㅠㅠ 그러니 그런 유혹에 넘어가고 말지...
    2014-12-31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