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귀환' 3화. | 조각난 연대기

2015-01-07 09:17 | 조회 7618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몸에 오한이 일어났다. 그 사이 얼마나 변했을 것인가? 진은 멀찍이 성문이 바라다 보이는 황야에서 내렸다.
황야를 통과하는 동안 진은 최근에 처형한 듯 장대에 매달린 시체들을 여럿 보았다. 이윽고 에페리움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에 놀랐다. 그 사이 나라가 융성한 것인지, 성문과 시가지는 대단히 화려해져 있었다.


진은 차마 궁정으로 가지 못한 채 시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려 했다. 물론 이백 년 전의 일을 자세히 아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궁으로 간다 한들 출입할 권리가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무덤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에페리움은 이제 고향이 아니라 낯선 도시일 뿐이었다. 진은 피로해졌다. 온갖 사람들의 온갖 말은 진이 이방인이라는 사실만 생생히 일깨웠다.
밤이 오자, 진은 혼란한 머리를 식히려 다시 황야로 나왔다. 대화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 사방에 고요히 매달려 있었다.


새롭게 얻은 권능 덕택에 진은 달빛조차 없는 황야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는 긴 밤이 다 가도록 황야를 헤매며 장대에 매달린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도 있었지만 이름도 사연도 알 수 없었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려던 진은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뭔가를 놓아두고 온 듯, 누군가가 부르는 듯, 이상한 예감이 솟아났다.


시체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던 진은 한 시체 앞에 섰다. 언뜻 보기에는 다른 시체와 마찬가지인 듯했지만 가까이 가 보니 아니었다. 이미 죽은 지 수십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바싹 마른 시체였다. 시체보다는 미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당연히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비바람과 태양, 그리고 새들에게 노출된 황야에서 이렇듯 고스란히 마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 이자가 누구인지 알아볼 만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진은 자리를 뜨려다가 한 번 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 미라나 다름없는 시체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은 시체를 쏘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시체의 머리에 얹었다. 마음속으로 대답을 원한다고 되뇌면서.


서서히, 시체의 피부가 핏기를 띠면서 펴지고, 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떨리고 뺨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혀까지 되살아나 목소리가 나오기까지는 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진은 이미 이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몸은 미라인 채 머리만이 되살아났지만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안탈론. 이백 년 전 부왕의 재상이자 어머니 에렉티나를 궁으로 데려가 진을 낳게 했던 자, 마침내 어머니의 정부가 되어 진이 에페리움을 등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던 남자.


진은 손을 뗐다. 이자를 더 살려내고 싶지 않았다. 진은 오랫동안 안탈론을 미워해왔다. 다시 마주치자 오래된 상처가 되살아났다. 안탈론은 진에게서 마지막으로 에렉티나를 빼앗아간 자였다.
그러나 안탈론은 이미 말을 할 정도로 살아나 있었다. 그가 바짝 마른 입술로 첫 마디를 뗐다.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마침내 보게 되어 감개무량하나이다.”



진은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려다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살아났다면 옛 일을 물어볼 수도 있겠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이백 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이고 난 뒤 진은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옛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은 안탈론이 처음이었다. 비록 불쾌한 상대였지만, 이자 이상으로 진이 궁금해 하는 것을 잘 알려줄 상대도 없었다.



“당신은 어째서 살아 있지?”



진이 묻자 안탈론이 웃었다. 되살아나다 말아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왕자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운명이었던 게지요. 이 꼬락서니로 살아있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기다린 보람이 있어 왕자님을 뵈었으니 살아있기를 다행…… 아니, 죽지 못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지는군요. 그 전에는 누가 목숨을 끊어 준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작정이었는데, 이제는 안 그래도 되겠군요.”



안탈론은 그가 ‘아주 멋진 저주’라고 이름붙인 주술적 처리를 받았다고 했다. 그 주술의 희생자가 되면 육신이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죽지 않았다. 눈알이 없어도 볼 수 있고, 귀가 쪼그라들어도 들을 수 있고, 뇌가 방부 처리가 되어도 생각할 수 있는 진정으로 멋진 주술이라고 했다.


덕택에 안탈론은 자신의 내장이 모조리 꺼내져 미라가 되는 과정을 일일이 보고 느끼며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맛보았다. 장대에 매달려 이곳에 방치되고, 독수리가 달려들어 살점을 파먹고, 마침내 바람과 햇빛에 바삭바삭 마르도록 안탈론은 모든 것을 생생히 보아왔다. 그런 상태로 이백 년을 살아왔다.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눈꺼풀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된 안탈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꽂힌 기이한 기념물이 되었다. 안탈론은 새로운 죄수가 끌려와 장대에 매달리고, 그자가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과정을 헤아릴 수 없이 보았다. 그는 그렇게 죽어가는 자들의 모습이 소설로 천 권은 쓰고도 남을 이야깃거리였다고 말했다.


진은 안탈론의 이상한 관점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고통에는 동정심을 느꼈다. 어쩌면 너무 고통을 많이 받아서 머리가 이상해졌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지독한 형벌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안탈론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에서 웃음소리가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커멓게 변한 목은 손목보다도 가늘었다.



“왜냐고요? 아니, 대체 왜겠습니까? 벌써 잊으셨습니까? 왕자님께서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로안드로스 선왕 폐하께서 돌아가셨을 때 누가 국왕으로 즉위했겠습니까? 왕비마마와 귀비마마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고 보면 그것도 예언이 이뤄진 게지요. 결국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왕위를 이을 자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아니, 참, 에페리움 사람들은 참 어리석지요. 에페리움의 저주를 푸는 법은 그토록 간단했는데. 왕자가 왜 왕을 닮아야만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저주는 바로 풀리는 것 아닙니까? 왕자님을 보십시오. 로안드로스 폐하께서 왕자님처럼 훌륭한 용모나 재능을 과연 지니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은 안탈론이 하는 수상쩍은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만을 다그쳐 물었다. 안탈론은 음산하게 웃었다.



“아하, 귀비마마가 어찌 되었느냐고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길을 가셨지요.”



로안드로스 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선왕의 육촌의 아들이었다. 새 왕은 사비나 왕비의 집안과 일찌감치 결혼으로 이미 맺어진 데다 양가가 도움을 주기로 밀약을 맺었고, 그래서 사실상 사비나의 아들이나 다름없이 행동했다. 로안드로스 왕이 서거하면서 마침내 최후의 승리자가 된 사비나는 에렉티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리고 가문의 주술사를 불러오더니 안탈론에게 지금과 같은 형벌을 내렸다.


에렉티나의 죽음은 이미 백 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진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의 기색을 눈치 챈 안탈론은 에렉티나의 최후와 잔혹한 처형방법을 일부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에렉티나는 살아생전 애타게 진을 찾았지만 델피나드를 떠난 후로 행적을 아는 자가 없자 깊은 절망에 빠졌다고 했다. 에렉티나는 사비나처럼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들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라고, 안탈론과 헤어져달라고 한다면 즉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마침내 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순간까지도, 에렉티나는 뒤이어 안탈론에게 닥칠 운명을 모르고서 제발 살아남아서 진이 돌아오도록 기다렸다가 도와줘야 한다고 다짐시켰다. 안탈론은 물론 약속했다. 이런 식으로 살아있게 될 줄은 모르고서.
어쩌면 에렉티나의 간절한 소원이 자신을 2백 년 뒤까지 데려와 진과 만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안탈론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국왕은 그때 즉위했던 왕의 손자였다. 왕은 또다시 사비나 왕비 가문의 후손을 왕비로 삼았다. 에페리움은 최근 번영하고 있었고, 함께 융성한 사비나의 가문의 힘은 왕가를 위협할 지경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그 가문은 앞으로도 영원히 번영할 것처럼 보였다. 에렉티나 따위를 죽인 일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진의 얼굴은 울분과 눈물로 얼룩졌다.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다. 안탈론은 그런 진을 은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볼수록 새로운 계획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희망의 맛은 백 년 묵은 술맛처럼 짜릿했다.
안탈론은 진이 권능을 갖게 된 이유를 몰랐지만, 권능을 가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자신을 되살려냈지 않은가? 백여 년 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놓쳐서는 안 되었다.


안탈론이 지금처럼 저주받은 몸이 되기 전, 그는 에렉티나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한 예언자를 찾아가 진의 생사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예언자는 옛날, 진이 태어나기 전에 안탈론이 받아 왔던 신탁을 상기시켰다.



‘네미 강에서 천공 호수에 이르는 모든 땅을 손에 쥘 자손이 태어나리라. 그는 버려진 자리에서 돌아와 버렸던 자리를 오랫동안 지배하리라.’



그 시절 진은 사라졌고 왕위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 후 아무도 그 신탁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탁은 거짓이 아니었다. ‘버려진 자리에서 돌아와’라는 말은 예전에 해석한 것처럼 왕이 버린 무희의 품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부왕이 죽은 후 백여 년이 흐르고서야 돌아온 진을 의미했다.



“네미 강에서 천공 호수에 이르는 모든 땅을 지배하실 분이시여.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시옵소서. 에페리움은 왕자님의 것입니다. 소신은 미력하나마 온 힘을 다해 돕겠나이다.”



진은 안탈론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무슨 힘이 있어서 나를 돕지?”



안탈론은 웃었다. 그러더니 세 가지 이유를 말했다. 첫째로, 자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였다. 둘째로, 그간 보고 들은 것이 많아 과거는 물론 최근의 정세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셋째로, 너무 오랫동안 몸에 주술을 간직한 결과 자신도 저주와 주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까지 말한 안탈론은 웃음을 걷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런 이유는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유가 없더라도 왕자님께서는 소신을 살리셔야만 합니다. 오래 전, 신탁을 받아온 자가 누구였습니까? 저였습니다. 무희였던 귀비마마를 로안드로스 국왕 폐하께 모셔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였습니다. 그 후로 사비나 왕비의 음모에 빠져 방랑하던 두 분을 다시 찾아내어 왕궁으로 모셔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역시 저였습니다. 귀비마마께서 왕자님을 공부시키고 싶다고 했을 때 백방에서 스승을 모셔온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왕궁에서 왕자님을 헐뜯는 자들이 있을 때마다 수없이 막아서며 로안드로스 폐하께서 큰왕자님을 택하시도록 암시해 온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저에 대한 미움을 잠시 접고 생각해 보십시오. 스무 살의 폴리티모스 왕자님의 모습은 폐하와 귀비마마께서 내려주신 육신에 저라는 사람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었습니다. 왕자님의 빼어난 모습을 뵐 때마다 소신은 자부심마저 느꼈습니다. 그리고 소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아 왕자님을 돕겠다는 귀비마마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이 안탈론을 가장 증오하던 시절에 안탈론은 진을 보며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자는 진에게 매번, 모든 원치 않는 운명을 안겨 준 장본인이었다. 진은 왕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고, 왕자다워지는 교육을 받고 싶지도 않았고, 안탈론의 비호를 대가로 어머니를 내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탈론이 그 모든 일을 한 결과 지금의 진이 있었다. 과연 창조자라 일컬을 법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을 걱정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일을 부탁한 사람도, 역시 그였다. 진이 그토록 미워했는데도, 끝내 유일하게 재회한 사람이기도 했다. 진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은 사라졌는데. 이렇게 질긴 인연이 또 있을까?


진은 결심을 하고 안탈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생기가 흘러들어가 몸이 되살아나자 마침내 안탈론은 장대에서 내려섰다. 그는 가장 먼저 진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폴리티모스 왕자 전하를 저의 주인으로 모시나이다.”



되살아난 안탈론의 몸은 미라였을 때의 모습이 남아 기괴했기에 로브와 두건 따위로 감추어야 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말한 대로 이미 내장이 모두 적출된 상태여서 무기나 독 따위로는 죽일 수 없었다. 완전한 불사는 아니라고 했지만 무엇으로 죽일 수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안탈론은 성문으로 돌아가는 진 곁에서 느릿느릿 걸으며 에페리움의 정세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을 잘 필요조차 거의 없는, 주술의 힘으로만 살아 있는 안탈론은 보기보다 훨씬 사악한 자였다. 침착한 말솜씨나 기억력과는 반대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며 복수심에 불탄 결과 비틀린 인격을 가지게 된 미치광이였다.
그런 안탈론이 진의 대부(代父)이자 유일한 조언자가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분노에 사로잡힌 젊은이를 마음대로 다룰 준비를 마쳤다. 안탈론은 원수들뿐 아니라 멀쩡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늘 분노한 상태였으나 초반에는 그런 모습을 교묘히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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