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21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5-01-14 09:18 | 조회 5141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이샤마 황태자는 주술사에게 자신이 본 환각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주술사는 그 의미는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샤마가 메레디스 장군의 군대로 돌아간 후 얼마 안 가 페레 정벌은 끝이 났다. 메레디스는 이샤마가 사라진 것을 알고도 황태자가 병환중이라고 하며 사람들에게 전장 이탈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비밀을 지켜 주었다. 그랬기에 파비트라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파비트라는 황태자가 주변의 우려를 뚫고 훌륭하게 정벌전을 수행했다고 생각해 몹시 기뻐했다. 이제 아들을 좀 믿어도 될 성싶었다. 동시에 온후하면서도 엄격한 메레디스가 황태자의 스승으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메레디스를 황도에 남게 하고, 대신 나디르를 탑의 도시로 보내는 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마음의 반은 탑의 도시에 가 있던 나디르로서는 뛸 듯이 반가운 명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남방 원정을 떠난 알키미가 베난의 주둔지를 찾아내어 전초전을 벌였고, 포위에 들어갔다고 알려 왔다. 이제 페레 걱정이 없어진 파비트라는 몸소 원정군을 이끌고 남방 원정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궁을 비운 동안 이샤마를 섭정으로 임명해 이번에는 통치의 경험을 쌓게 할 계획도 있었다. 메레디스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에도 훌륭히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샤마의 백일몽 증상은 궁으로 돌아온 뒤 더욱 심해졌다. 그는 페레 부락에서 본 환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멀쩡한 궁정을 돌아다니면서도 문득문득 그때 본 환각이 눈앞에서 겹쳐졌다. 이렇게 훌륭한 궁전이 어떻게 그런 폐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제국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폐허가 된 수도의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눈앞의 영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강해져 갔다. 국정은 사실상 메레디스가 알아서 이끌어 가는 형편이었다. 메레디스는 이샤마의 상태를 알았지만 뜻밖에도 질책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한편, 파비트라가 남방 전선에 합류하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베난 군이 전면 공세로 나왔다.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메레디스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베난이 파비트라를 남방 전선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 오스테라가 황도를 공략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그들의 밀약이 성립하려면 베난 군은 계속해서 여제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나밀과 제니리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정보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어느 날, 남방 원정군은 날마다 벌어지던 교전에서 일부러 지리멸렬하게 물러섰다. 그리고 그날 밤, 갑자기 철군을 단행해 베난 군의 진영으로부터 멀찍이 떠나왔다.



하루 밤낮도 지나기 전에 베난 군은 헐레벌떡 여제의 군대를 뒤쫓아 왔다. 여제의 깃발을 세워둔 곳으로 유인된 베난 군은 협곡 안쪽으로 들어섰고, 기다리고 있던 알키미의 매복군이 그들을 덮쳤다. 주력군은 어느새 알키미를 잘 따르게 된 연의군이었다.
연의군의 사나운 공격을 받은 베난 군은 패주했다. 무엇보다 베난이 사로잡힌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나머지는 허겁지겁 본영으로 달아났으나 그곳은 이미 나밀이 이끄는 별동대가 점거해버린 뒤였다. 이 전투를 통해 나밀은 참모뿐 아니라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도 있음을 입증했다.



모두가 기다리던 승전보가 황도에 날아들었다. 마침내 남방 지역이 여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어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제국의 역사상 처음 있는 쾌거였다.
온 황도가 기쁨으로 술렁였다. 곧 돌아올 여제와 원정군을 위한 환영식이 대대적으로 준비되었다. 이샤마는 그런 것이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다. ‘무너질 제국에 땅 한 조각을 더하면 달라진단 말인가. 어차피 그 땅은 거기에 계속 살아가는 자들의 것일 뿐이다’



파비트라가 황도로 개선하자 사흘 동안 축제가 벌어졌다. 황도로 진군 중이라던 오스테라 군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종적도 찾기 힘들다고 했다. 황도에서는 어딜 가나 여제를 칭송하고 오스테라 인들을 비웃는 이야기가 오갔다.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아이들의 노랫소리 속에서도 흘러나왔다.
재상이 된 메레디스는 여제의 권위를 전 제국에 떨치기 위해 원정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다. 비파 항구를 재점령했던 북방 원정, 탑의 도시를 되찾았던 서방 원정, 로칼로카 산맥에서 페레를 내쫓은 동방 원정, 그리고 이번 남방 원정까지, 네 개의 기념비가 계획되었다.



하지만 이샤마는 그 모든 영광이나 기쁨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다시 꿈을 꾸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폴리티모스 왕자는 어머니와 반목하고 에페리움을 떠나갔다. 이후 새로운 성이 나타나더니 영주의 손녀이지만 부엌데기 취급을 받는 소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성에 소녀의 누이동생이라는 아기를 두고 갔고, 우여곡절 끝에 소녀는 아기를 직접 키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샤마의 그림 실력은 궁정 화가 못지않았다. 그려 놓은 그림은 수백 장에 이르렀다. 그는 그림을 소중히 여기며 누구도 훼손하지 못하게 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이샤마는 그림을 바라보다가 종이와 안료가 바랜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그림이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이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문득 폐허로 변한 하리하랄라야의 환각이 떠올랐다.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림은 바래고 하리하랄라야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인 자신은 그 중 어느 쪽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뭔가를 이룩하고 남긴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날 밤, 이샤마의 꿈에서는 소녀가 동생과 함께 성을 떠나 델피나드로 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언덕에서 사촌오빠와 작별한 소녀가 돌아섰을 때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얼굴이 익숙했다. 수 년 전, 처음으로 꾸었던 특별한 꿈에 나타났던 신성한 여인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제야 이샤마는 그녀가 신이 아니라 오래 전 정원에 들어갔다던 영웅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정원에 들어갔던 영웅들의 과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록도 없고, 구전조차 없는 그들의 삶이 자신의 꿈속에만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라진 역사가 그의 꿈속에 있었다.



신성한 여인은 후손들이 원대륙이 겪은 일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록은 적은데다 훼손되어 있었고, 왕실 창고에 갇혀 있었고, 무엇보다 누구도 들춰보지 않았다. 후손들이 알려 해도 알 길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신성한 여인이 이샤마에게 원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후손들이 먼 훗날 정원 앞에 이르기 전에 ‘준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꿈에서 여인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샤마조차 준비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후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비록 이샤마 자신은 정원에 갈 수 없다 해도 언젠가 후손들은 갈 것이다. 그는 후손이 준비되도록 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무(無)로 돌아가고 말 대륙 정복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다. 후손들의 미래가 그의 꿈과 기록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제국의 황태자였다. 언젠가는 제국을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이 작업에 여생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꿈에 본 ‘전나무의 여왕’ 로지아를 떠올렸다. 자신이 로지아의 아들 레이븐처럼 어머니의 뜻을 저버린다면 여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날 밤, 이샤마의 꿈에 오랜만에 신성한 여인이 나타났다.
이샤마는 여인에게 자신이 준비되었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네가 준비되었는지는 너 자신이 가장 잘 알 거라고 했다.
이샤마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원대륙에서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모두 목격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그리고 자신이 그걸 다 본다 한들 기록해 남길 수는 있을까? 그림으로 그린다면 또 얼마나 보존될까? 작은 불길 한 번이면 사라져버리는 것이 종이에 그린 그림이 아닌가?



마침내 이샤마는 자신이 황태자만 아니라면 이 과업을 위해 남은 생애를 바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고, 따라서 자신은 준비되지 않은 자였다.
그는 여인에게 이런 중대한 일에 왜 나를 택했느냐고, 다른 사람을 택했다면 이런 문제는 없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답했다.




“네가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내가 보여주는 무늬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깨어나 그리도록 하라.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할 테니 여러 번의 꿈에 걸쳐 보며 매번 작은 부분만이라도 기억해서 정확하게 그리도록 하라. 또한 그림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너는 그것을 새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 너는 ‘성스러운 자의 공양(供養)’을 찾도록 하라. 그것은 원대륙에서 온 물건으로 하리하랄라야 왕궁에 보관되어 있다. 너는 네가 그린 무늬를 ‘성스러운 자의 공양’ 위에 새겨야 한다. 네가 그것을 다 새기는 날, 너는 네가 준비된 자인지 알게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이샤마는 황궁 창고를 수색하게 했다. 그곳에는 정말로 ‘성스러운 자의 공양’이라는 물건이 있었다. 마치 물을 담을 때처럼 두 손바닥을 오므려 내민 모양의 흑요석 조각이었는데 가운데가 이상하게 조각되지 않고 비어 있었다. 마치 그 위에 뭔가를 새기라는 것 같았다.





본 콘텐트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댓글 4
  • 수블리 @진 | 38레벨 | 자연의 노래꾼 | 누이안
    우왕 1등이에요~:)
    2015-01-14 11:58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환술사 | 엘프
    그렇게 이샤마는 달빛조각사의 길을 걷ㄱ....(응?)
    2015-01-14 12:50
  • 명석몽 @안탈론 | 52레벨 | 유령 용사 | 페레
    하리하랄라야 폐허 맵속에 이샤마 일것이라 예상되는 npc  근처에  역사를 그려놓은 부조들이 있지.   그는 아직도

    꿈꾸고.  책을 써내려가고 있는데  리턴드가 생명을 연장하라고 준 푸른병을 누가 없애버렸고 그 배후가 누구인지도

    알게되는 것으로 퀘스트를 통해  마무리되고 있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현재 이야기므로 패치가 되지 않는한 다음

    이야기를 알기는 어렵겠지.
    2015-01-14 16:57
  • 루어매니아 @진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근대 이대로라면 우리도 정원 문턱도  구경 못해보것는디?
    2015-01-14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