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22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5-01-21 09:10 | 조회 4895





파비트라의 남방 원정 성공은 오스테라의 멸망을 알리는 장송곡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남방 원정이 가능한 한 오래 시간을 끌어주길 바랐다. 그 사이에 외교와 책략으로 국경 도시들을 흔들어 파비트라의 운신의 폭을 좁혀보려 했다.
그러나 베난은 성급했고, 파비트라는 용의주도했다. 파비트라에게는 용맹한 알키미와 영리한 나밀, 진중한 메레디스도 있었으나 베난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륙 최고의 책사인 류이진이 지키는 비파 항구나, 옛 주군의 도시를 지키려는 충정이 지나칠 정도인 나디르가 다스리는 탑의 도시도 공략 가능성은 없었다. 페레를 이용해보려 한 계략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파비트라가 원정 기념비를 네 곳에 세운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오스테라 사람들은 동요했다. 기념비의 의미는 제국의 완성이었다. 이제 여제에게 숙이지 않은 유일한 땅은 단 하나, 오스테라뿐이었다. 가장 부유하되 가장 충성스럽지 못한 도시, 완전히 지배된 적이 없는 땅. 여제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인가?
기념비의 의미는 스스로 숙이고 들어오라는 뜻일까? 아니면 곧 짓밟을 테니 각오하라는 뜻일까? 오스테라 안에서도 온갖 예상이 오고갔다.


일부는 이것으로 제국이 완성되었으니 오스테라를 내버려두겠다는 뜻이 아니냐고도 했지만 지난 일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낙관적 추측을 비웃었다. 여제는 결코 오스테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스테라는 이스밀을 죽였고, 여제가 제국을 거의 잃을 뻔하게 만들었다. 그런 반역자들을 그냥 두고서 제국의 안녕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제의 오스테라 원정을 막는 걸림돌은 모두 없어졌다. 전쟁은 시간 문제였다.


이 무렵, 발니오는 더 이상 아르카디오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그간 아르카디오가 해 준 모든 조언이 승리의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전제한 채 마지못해 낸 차선, 또는 차차선의 계략이었을 뿐임을 이미 잊은 까닭이었다.
그걸 잊은 자의 눈으로 보기에 아르카디오의 모든 계략은 실패로 돌아간 듯했다. 그나마 남은 누이안 거류지 정책조차 이즈나 왕가의 내부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그들의 개입을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류이진이 침투시킨 첩자들이 오스테라에 불안한 소문을 퍼뜨렸다. 여제가 편성한 원정군이 사상 최대 규모라는 소문, 출병 준비를 마치고 신전에서 날을 택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 발니오는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소문 등이 퍼진 가운데 여제가 오스테라가 스스로 항복해 오지 않는 것에 분노했다는 소문이 뒤를 이었다.
점차 빨리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커져갔다. 예전에 아르카디오가 광장의 점포를 세내어 했던 문답이 새삼스럽게 돌아다녔다. 아르카디오를 흉내 내어 연설대를 만든 자도 여럿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스테라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를 외쳤다.
반면 그 방면의 원조인 아르카디오는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테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의견을 얻고자 찾아왔지만, 그는 만나고 싶지 않다며 모두 물리쳤다.


발니오는 술독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그도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희생양이 필요했다. 과거 사람들이 발니오의 목을 잘라 여제의 자비를 구하면 어떨까 생각했듯, 발니오는 또 다른 사람의 목을 잘라 바치면 어떨까 생각했다. 바로 카타니아 황녀의 목을.


그간 카타니아 황녀는 발니오의 비호를 받으며 그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한때 발니오는 카타니아로부터 이샤마 황태자가 이스밀의 자식일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제 자식을 황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렇게 시작된 밀월이었고, 그런 그들의 관계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발니오는 사석에서 술을 마시며 자신을 황제의 사위라고 칭한 일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발니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계책을 떠올렸고, 카타니아도 금세 그런 기색을 눈치 챘다. 그녀야말로 긴 세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눈치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카타니아는 밤을 틈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오스테라를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여제가 대륙을 통일하다시피 했기에 더 이상 뒷일을 도모할 땅이 없었다. 누가 그녀를 받아줄 것인가? 파비트라의 맏언니이지만 동시에 철천지원수인 그녀를?
발니오의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카타니아는 어느 노부부의 호의로 시골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신분을 숨긴 채, 남편을 찾아가려고 오스테라를 떠났으나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갈 곳이 없어졌다고 둘러댔다.


노부부는 친절해서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라며 작은 집을 내어주고 텃밭도 가꾸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카타니아는 그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시골 아낙네가 되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극도로 우울해져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순간적 착란에 빠져 자기 아이 중 하나를 거의 죽일 뻔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부부가 아이들을 어디론가 보내버린 뒤였다. 카타니아는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노부부는 미친 여자에게 아이들을 돌려줘선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절망에 빠져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던 카타니아는 아이들을 되찾지 못하자 마침내 발광했다. 미쳐버린 카타니아의 입에서는 온갖 비밀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노부부를 비롯한 시골 사람들은 그녀의 두서없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고, 다만 파비트라 여제를 집요하게 욕하는 것 때문에 겁을 먹어 그녀를 창고에 가두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헤매는 어머니에게 인정을 발휘했던 노부부도 미친 여자에게는 냉담했다.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만 넣어 줄 뿐, 해도 들지 않는 창고에 갇혀 있던 카타니아는 어느 날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다른 사고로 그런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당시 노부부는 카타니아의 아이들을 오스테라 근처 소도시에 사는 친척들에게 보냈지만, 남의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귀찮아진 그들은 아이들을 아무에게나 양자로 주어버렸다. 한 집에서 데려간 것도 아니어서 두 아이는 그들끼리도 떨어졌다. 그 후 전쟁이 벌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는 가운데 그들을 데려간 가족들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비록 출생이 기구하긴 해도 카타니아의 아이들은 황족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그들의 행방을 추적했다. 하지만 죽은 카타니아는 묻힌 곳도 찾을 수가 없었고, 아이들은 행방이 묘연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파비트라는 오스테라 원정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갔다. 숙원이었던 이스밀의 복수였기에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을 보이자 그녀는 황궁의 재산인 금붙이와 개인적인 패물을 아낌없이 처분했다. 내탕금도 원정 준비에 쓰도록 내놓았다.
탑의 도시의 나디르, 비파 항구의 류이진도 군대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십만 대군이 오스테라를 완전히 둘러싸게 되리라. 그러려면 엄청난 지출을 각오해야 했지만 또한 오스테라는 하리하라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다. 원정에 성공하면 그 도시의 부는 제국에 골고루 분배될 것이었다.


파비트라는 이번이 마지막 원정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나이가 들었다. 전쟁터보다는 궁에서 머무는 편이 어울리는 나이였다. 어쩌면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기에도 적당한 나이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샤마는 언제부터인가 흑요석 조각을 붙들고 궁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어느 날, 파비트라는 굳은 마음을 먹고 아들을 불렀다.



“황위에 오른 후 어언 수십 년, 그간 나는 제국을 얻고, 잃고, 되찾았다. 그러면서 많은 일을 보고 겪었다. 제국을 얻는 것은 어렵지만 지켜내는 것은 더 어려우며,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더구나. 나도 그 도리를 지난 전쟁들 속에서 겨우 깨우쳤다. 황제는 일면식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편과 소원을 알고 공평하게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진실을 말하자면 제국의 신민들은 황제가 없어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기에 황제는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는 존재여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다면 없느니만 못한 것이다.”



말하는 동안 파란만장한 과거가 머릿속을 스쳐가 파비트라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동시에 고난 속에서 뼈에 새긴 교훈을 말하고 있건만, 이샤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지 조바심이 일었다. 아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원정은 내 마지막 출정이 될 것이다. 오스테라에서 승리한 뒤 돌아오면 태자는 그날로부터 그림이나 조각 따위의 쓸데없는 일은 모두 그만두도록 하여라. 내가 직접 군왕의 도리를 가르칠 것이다. 어미는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황위에서 물러나 쉬고 싶다. 어서 나를 편히 쉬게 해다오.”



이샤마는 대답이 없었다.
파비트라도 마음속으로는 수천 번 말하고 싶었다. 죽은 이스밀이 너의 아버지이며, 이번 원정은 그를 위한 복수라고. 낙조대의 난 이후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산해진미의 맛도 몰랐고 어떤 즐겁고 우스운 일에도 진정으로 웃지 못했지만, 그 원한을 갚고 나면 단 하룻밤이라도 편히 잠들 것 같다고. 너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녀 자신과 이스밀이 어떤 시련을 감수했는지 아느냐고. 이스밀을 잃은 자신에게 이샤마가 황위에 올라 훌륭히 다스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소원인지 아느냐고.


그러나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 자리에 미련이 없어 보이는 이샤마에게 빌미를 만들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또한 이스밀의 죽음이 이샤마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원치 않아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샤마는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훌륭하게 다스려 다시는 제국을 잃지 않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저승에 가서도 이스밀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을 것이다.


그해 가을, 파비트라가 일으킨 오스테라 원정군은 황도를 떠나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파비트라 대 여제의 최후의 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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