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의 기록
'파비트라 대 여제' 23화. 신대륙의 인물들
2015-01-28 09:17 조회 18649기나긴 진군 끝에 탑의 도시에 도착한 파비트라는 나디르의 영접을 받으며 반가운 얼굴과 마주했다. 류이진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제와 류이진은 일엽편주에 황제와 신하 하나, 서로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던 시절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그랬건만 비파 항구를 맡기고 황도로 떠난 후로는 단 한 번도 재회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나보니 늘 젊다고만 생각했던 류이진도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난데없이 이스밀을 찾아와 정세를 줄줄 읊던 류이진은 늘 중책을 맡기기에 지나치게 어려 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간 류이진은 비파 항구를 지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융성시키고 확장해 제국 3대 도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동방 출신인 류이진이 적극적으로 도입한 농사 기술은 이미 정착 단계였고, 동방풍의 건물도 많이 들어서서 도심지는 언뜻 베로에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직접 키운 정예병도 완벽히 장악하고 있어 이니스테르의 땅을 매번 땅따먹기 하듯 조금씩 잘라먹고 있는데 항의를 받아도 댈 핑계가 백가지씩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한때 재계약을 하느니 마느니 할 정도로 충성심하고 거리가 멀던 류이진이 어느새 여제의 첫째가는 충신이라니 세월이 만드는 변화는 놀라웠다. 그렇게 되기까지 겪은 일을 생각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폐하께서도 이제 예전 같은 미모는 아니시군요. 뭐, 저도 그렇지만. 폐하나 소신이나 제국이라는 괴물한테 피를 빨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죠.”
별실에 마주 앉아 첫 마디를 들으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류이진은 새파랗게 젊고 놀랄 만큼 영리했지만, 동시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교만하기도 했었다. 파비트라는 웃었다. 동시에 눈물이 고였다. 제국을 되찾고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쉬지 않고 달려왔다. 류이진도 그들 중 하나였다. 파비트라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는 류이진이 유일했다.
“경이야말로 그 넘치는 재능으로 변경 도시 하나를 지키자니 힘이 남아돌지 않았어? 황도에서 연달아 일이 터질 때 경의 존재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를 거야.”
“제국을 경륜해야 할 소신이 어촌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건 대륙적인 낭비였습니다만 그 결과 비파 항구를 어떤 땅보다도 훌륭하게 변모시켰다고 자부합니다. 소신의 개인적인 생각이오나 나디르 경도 탑의 도시에 대해 자부심만 강하지 이제 비파 항구보다 더 나은 도시라고 하기 어려울 겁니다.”
파비트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알지만 나디르 경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줘. 어쨌든 이번 전쟁은 내 최후의 임무야. 경도 조금만 더 힘내줘.”
류이진은 금세 눈치를 챘다.
“폐하, 설마 양위하려 하십니까?”
“짐도 장차 저세상에 가려면 푹 쉬면서 미색을 되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저세상에 가서 만날 사람이 누구이던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류이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도 어지간히 끈질기시네요. 하지만 이스밀 공도 끈질기기로는 만만치 않았지요. 재회하시면 엊그제 헤어진 듯하실 겁니다.”
류이진은 반가운 얼굴을 하나 더 소개시켜 주었다. 오래 전, 파비트라의 처벌에 반발해 떠나갔던 마적 두령 케사드였다. 수배를 내리고도 발견되지 않더니, 한때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류이진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던 모양이었다. 류이진은 명분에 좌우되는 성품이 아니었지만 파비트라가 케사드를 벌했어야 하는 이유를 잘 이해했다. 동시에 그런 케사드가 행방불명인 상태의 장점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케사드는 류이진의 군대에서 홍군의 임시 대장이었다. 파비트라가 케사드를 사면한다면 정식 장군으로 임명할 거라는 말을 듣고 파비트라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이건 협박이나 다를 바 없군. 내가 사면하지 않는다면 홍군의 지휘관이 사라지지 않나.”
류이진은 파비트라를 너무 잘 아는 나머지 질책을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소신 같은 신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어찌 보면 파비트라마저 속이고 숨겨뒀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파비트라는 오히려 류이진의 행동이 고마웠다. 그녀 또한 케사드를 수배 내리면서도 발견되지 않기를 빌었었다. 이미 세월이 흘러 그 당시 군율의 문제는 잊혔기에 파비트라는 쉽사리 케사드를 사면해 주었다. 그리고 비파 항구를 탈환할 당시 청군, 녹군, 흑군을 지휘했던, 달칸, 무이곤, 하딤까지 모두 불러 오랜만에 옛 이야기를 하며 어주를 하사했다. 아게우스가 함께하지 못하는 것만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 시절 새파란 서생 같던 류이진을 가장 못 미더워하던 케사드는 어느새 류이진을 충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케사드가 말했다.
“소신은 연 총독께서 각 군 십여 명에 불과하던 제국 수호군을 정말로 4만 5천으로 만들어내시는 데 놀라 그 후로는 모래와 소금으로 군대를 만든다고 해도 믿게 됐습니다.”
며칠 뒤, 파비트라가 이끄는 황도군과 나디르의 연의군, 류이진이 이끄는 비파항구 군대는 오스테라의 동쪽과 남쪽을 완전히 둘러쌌다.
류이진은 남아돌았다는 힘으로 그 사이 해군까지 키워 바다도 절반 넘게 봉쇄했다. 서남쪽 일부는 열려 있었지만, 큰 배를 댈 공간이 없어 그리로 달아난다는 것은 사실상 패배를 뜻했다. 포위를 마친 후 파비트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시민들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동시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배자들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발니오를 비롯한 오스테라의 귀족 가문들은 최후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몇몇은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나기를 택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그대로 남았다.
그들이 여제의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여제는 압도적인 군세는 물론이거니와 용장 나디르와 대륙 최고의 전략가 류이진을 거느렸다. 그에 반해 오스테라 군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테라 귀족들은 부딪쳐 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자존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테라 인들은 성문을 모조리 폐쇄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오스테라 성벽은 튼튼한 데다 내부의 물자도 풍부해서 수개월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몇 년까지도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눈치 챈 파비트라는 류이진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심리전이었다.
류이진은 우선 해군을 움직여 바다 쪽의 시설들을 포격해 겁을 주는 반면 시민들의 탈출을 독려했다. 그 덕택에 귀족들로부터 탈취한 두 대의 탈주선이 넘어왔다. 탈출한 자들은 오스테라의 민심을 이모저모 전했다.
류이진은 탈주자들을 이용해 동요를 유도했다. 동시에 발니오의 목에 포상을 걸고 전 가문의 사면을 약속했다. 그런 다음 반역자 카타니아 황녀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카타니아를 내놓아서 파비트라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진작 넘겨주었을 테지만, 카타니아가 도망쳐버린 뒤였기에 발니오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류이진도 이미 그런 줄 다 알고 있었다.
발니오는 카타니아가 일찌감치 오스테라를 탈출해버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시민들은 발니오와 귀족들이 카타니아를 살리고 싶어 숨겨둔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여제의 군대가 성벽 밑에 닥친 지금, 시민들은 무엇을 넘겨주고라도 여제의 사면을 받고 싶어 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진실이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카타니아만 내놓으면 여제가 오스테라를 용서할지도 모르는데, 오스테라 시민들의 목숨보다 반역자 황녀가 중요하단 말인가?
일찌감치 오스테라 내부에 심어 둔 첩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니오와 카타니아의 관계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르카디오를 흉내 내어 시장에 연단을 만들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실은 류이진의 첩자였다. 상대의 수법을 흡수해 역이용하는 것은 류이진의 장기 중 하나였다.
악선전에 견디다 못한 발니오는 연단을 폐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언론을 탄압하는 꼴이 되어 류이진이 퍼뜨린 의혹에 더 불이 붙었다. 연단을 처음 만들었던 아르카디오 때문에 시장 광장의 연단은 어느새 옳은 말을 하는 자들의 자리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런 연단을 폐쇄한 부작용으로 인해 이제 오스테라 시민들 중 절반 이상은 발니오가 제 자식을 낳은 카타니아를 어딘가에 숨겨 놓았다고 믿게 되었다.
오스테라의 민심 이반이 심각해졌을 무렵, 파비트라는 첫 공성전을 지시했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는 동안 공성기를 충분히 준비했던 나디르는 기다렸다는 듯 맹공을 퍼부었다. 날이 저물면서 그날의 공세는 겨우 마무리되었지만 오스테라 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공격이 계속된다면 며칠이나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발니오는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결국 아르카디오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밤중에 아르카디오의 집으로 찾아갔던 사자는 그의 집이 텅 비어 있더라는 소식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발니오는 아르카디오마저 도망친 것이라고 생각해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모두가 승산이 없다고 본단 말인가? 신들은 이제 오스테라를 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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