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24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5-02-04 09:21 | 조회 18005









나디르의 공세 이후 오스테라는 장기 농성 태세에 들어갔다. 아무리 도발해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나오지 않고 성벽만 굳건히 지키는 전략이었다.
이런저런 도발이 전혀 먹히지 않자 나디르는 한동안 공성기로 성문을 부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수 일이 걸려 겉으로 보이는 성문이 반파되고 나서야 이것이 쓸모없는 전략이었음이 밝혀졌다. 오스테라인들은 여제의 출병 소식을 듣고 성문 뒤에 새로운 성벽을 두텁게 쌓아 사실상 입구를 막아버린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성문을 부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벽도 지속적으로 보강되는 중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공성차였지만 류이진이 미리 운반시켜 둔 목재를 다 써버려서 추가 수급이 쉽지 않았다. 주변의 나무는 오스테라인들이 모조리 베어 가버렸다. 결국 비파 항구에서 뱃길로 목재를 실어 오기로 결정했다. 그러자니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오스테라도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장기 농성은 보급선이 긴 원정군에게 치명적인 전략이기는 했지만 내부의 사기도 심각하게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었다. 식량 징발 및 보급제가 실시되고 해가 진 이후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해안가 봉쇄로 어업 및 무역이 사라진 것은 물론, 농업은 생산 및 수확이 완전히 통제되고 수공업도 마비되었다.
자연스러운 상업 거래 자체가 자취를 감췄다. 술은 생산이 금지되었다. 연회가 사라지고 여흥, 예술, 교육도 사라졌다. 사치품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줄줄이 파산했다.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물자의 가격은 암거래 시장에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타지에 가족이 있는 시민들, 특히 황도나 탑의 도시, 비파 항구에서 이주한 자들은 문 밖에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파비트라와 류이진, 나디르를 욕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들을 악귀, 뱀, 돼지 따위로 묘사한 낙서가 거리를 뒤덮었다. 카타니아와 발니오를 욕하는 낙서도 동시에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성벽 너머의 적과 성벽 안의 지배자를 모두 미워했다.
그런 상황이니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도 많았다. 도망치려다 붙잡힌 자들은 광장에서 목이 매달렸다. 어느 날 아침에 나와 보면 이웃이던 일가족이 나란히 매달려 있곤 하는 일이 잦아지자 사람들의 마음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시민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두려움에 지배당했다. 겉으로는 ‘오스테라 성벽은 3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지만 3년이나 이런 꼴로 살 것을 생각하면 아찔한 노릇이었다. 암살 시도를 몇 번 겪은 발니오는 아예 집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몇 귀족들이 민심을 다잡아보려 했지만 발니오가 꼼짝도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것도 쉽지 않았다.
교착 상태가 길어졌지만 류이진은 끄떡 않고 교란책을 폈다. 탈주자들에게 편지를 쓰게 해 화살에 묶어 항구로 쏘게 했다. 새들의 발에 묶어서도 보냈다. 그 결과 처음으로 폭동이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학살당한 수백 명의 시민들은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소식을 들은 파비트라는 시민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라고 명했다. 그 행동은 오스테라 성벽 안쪽에도 알려졌다. 민심이 술렁이며 발니오와 파비트라를 비교하게 되자 발니오는 발끈해 그런 말을 퍼뜨리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게 했다.
류이진은 파비트라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칭찬했지만, 파비트라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파비트라의 안색이 나쁘다고 느낀 류이진이 심중을 묻자 파비트라가 말했다.



“짐은 저들을 보호하고자 황제가 되었는데 보호하기는커녕 아까운 목숨을 빼앗고 있구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스테라에는 죄가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없거늘.”



류이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오스테라는 이스밀 공이 돌아가시기도 전부터 반역을 꾀해 왔으며, 끝없이 음모를 꾸며 제국을 어지럽혔습니다. 저들의 계략에 휘말려 죽어간 병사와 백성이 그간 얼마입니까? 페레 정벌과 남방 정벌에서 치른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선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저들을 완전히 굴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설픈 관용은 이후 새로운 전쟁을 부를 뿐입니다. 이 반역자들을, 이 전쟁을 황태자 전하께 물려주실 작정입니까?”



파비트라는 삶 자체가 곧 전쟁이었던 여제였다. 전쟁을 하자면 백성들의 희생을 피할 수 없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파비트라의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파비트라가 과거에 해 온 전쟁이 약자 입장에서 치른 도전이었다면 이번에는 파비트라가 절대적 강자였다. 이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하나의 도시에 불과한 오스테라가 제국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트라는 저들을 굴복시키고자 여기까지 왔다. 류이진의 말이 맞긴 하지만 힘으로 짓밟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을까?


전쟁이 길어져서일까, 부쩍 혼란스러운 꿈이 잦아졌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에 맨발로 물고기를 잡던 오스테라의 찬란한 해변이 나타나고, 그대로 이스밀과 백년해로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카타니아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백성들에게도 그 편이 더 낫지는 않았을까?


교착 상태가 넉 달째에 접어들자 오스테라도, 파비트라 군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치 상태에 지쳐갔다. 물자 소비를 극도로 줄이느라 양군 병사들의 불만도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때 칩거 생활 중이던 발니오에게 아르카디오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전까지는 발견하기만 하면 목을 매달겠다고 떠들고 있었건만 발니오는 반색했다.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아르카디오는 어디를 헤매다 왔는지 행색이 초췌했다. 그가 한 첫 마디는 자신을 여제의 진영에 사신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정말인가? 전쟁을 끝낼 비책이라도 있나?”



아르카디오는 고개를 저었다. 협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니 조건을 줄 필요도 없다고 했다. 다만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칩거하는 동안 발니오는 아르카디오가 말해준 계략들을 하나하나 복기해보고 있았다. 그러다가 처음 만났을 때 아르카디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아르카디오는 항복하자고 말했다. 승산이 없다면서.
돌이켜 보면 아르카디오야말로 패전론의 주창자였다. 오늘 코앞에 닥친 여제의 대군은 과거 아르카디오가 경고한 대로 섣불리 시도한 계략이 불러온 대가였다.


처음부터 패전론자였던 아르카디오는 이제 잘 패전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비록 엄청난 길을 돌아왔지만 발니오도 아르카디오의 뜻을 이해했다. 아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튿날, 오스테라 사신이 대화를 요청한다는 보고가 파비트라 진영에 날아들었다. 파비트라는 일단 그들을 막사로 들이게 했다. 그러나 아르카디오가 대동한 노부인을 보자 깜짝 놀랐다. 노부인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눈도 보이지 않았지만 파비트라의 목소리를 듣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폐하, 너무 긴 세월이 흘렀군요.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노부인은 열세 살의 파비트라가 연고자 한 명 없는 오스테라로 왔을 때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었던 사람이었다. 파비트라는 그녀를 무척 따른 나머지 결혼식 때 오지 못하는 친어머니 대신 어머니 노릇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녀도 순진하고 쾌활한 황녀를 딸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카타니아가 찾아와 오스테라를 떠난 후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가끔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날 이후 오스테라는 줄곧 파비트라의 적국이었던 터라 생사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은 워낙 나이가 많아 이미 죽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리땁던 폐하의 용안을 제가 이제 보지 못합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드리던 때가 엊그제 같거늘…….”



파비트라도 눈물이 울컥 솟았지만 꾹 참아냈다. 그리고 기억하노라고 짧게 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이 사람의 존재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드러내어선 안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노부인을 위해서도.
노부인은 옛 일을 말하다가 곧 오스테라의 시민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털어놓으며 여제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파비트라가 대답하지 않자 아르카디오가 말했다.



“폐하, 오스테라가 원했던 것은 반역이 아니라 독립이었습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독립을 바라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차별과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아라야니 1세 폐하께서 매긴 중과세는 무역항 오스테라의 존립을 위협할 지경이었지만, 한 번도 경감된 적이 없었습니다. 세금을 피하려는 밀무역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지만, 그 또한 살고자 하는 백성의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수없이 세금을 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변방 도시의 사정은 한 번도 황제 폐하의 귀까지 전해지지 않는 듯했습니다. 오해에 지치고 황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에 눈이 먼 저희는 혹 오스테라를 도와줄 황제께서 등극하실 수는 없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었고, 혼란기에 이곳저곳에 어리석은 줄을 대며 갈팡질팡했습니다. 이제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신 폐하께서 저희의 우둔함을 벌하고자 친히 이곳까지 오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모든 하리하란이 첫 발을 내디뎠던 이 땅을 예전처럼 바위더미로 되돌리셔야 하겠습니까? 오스테라에서 일어났던 빛이 마침내 이 위대한 대륙을 일구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제발 그 빛을 끄지 말아주십시오.”



뒤에서 듣고 있던 류이진은 내심 감탄했다. 대체 이자는 누구인가? 칼리아이라면 오스테라의 군소 가문 중 하나로만 알고 있었고, 그간 업적이 부각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명백한 잘못은 애매하게 눙치고 자기들을 피해자로 만들어 동정심을 유발하는 화술이 범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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