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25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5-02-25 09:26 | 조회 5618







반면 나디르는 벌컥 화를 내며 여제에게 저들의 간사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고했다. 오스테라는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었다. 늘 저들이 대륙의 주인인 양 거만했다.
나디르는 오스테라와 수백 년간 경쟁 관계였던 탑의 도시 출신이었고, 오스테라가 탑의 도시의 왕자나 다름없던 이스밀을 살해하고 탑의 도시마저 한때 차지했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복수를 완성할 차례였다.
잠시 후, 파비트라가 대답했다.



“짐 역시 오스테라의 백성들을 걱정하고 있다. 발니오를 비롯한 죄인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카디오가 어떤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든, 말 몇 마디로 전쟁이 끝날 리는 없었다. 아르카디오도 알고 있었다. 파비트라는 노부인에게 투항을 권했지만 노부인은 가족들이 성 안에 남아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르카디오와 노부인은 오스테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류이진은 이 묘한 해프닝을 흘려 넘기지 않고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다. 저 정도의 재주를 가진 자가 이곳까지 아무 목적 없이 왔을 리 없었다. 그러나 저들은 패전 조건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기껏 한 것이라고는 막무가내로 용서를 빌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간 것뿐이었다.
파비트라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노부인을 데려오긴 했지만, 이만한 시간과 물자를 들인 전쟁에서 그런 일로 뜻을 뒤집을 정도로 연약한 여제가 아니었다. 저자들인들 그걸 모를까?
이걸로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왔다면, 저자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수 일 뒤, 마침내 목재가 도착했다. 공성차가 하나하나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스테라 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성차가 완성되자 파비트라는 신들에게 제례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튿날, 총공격을 명령했다.
날이 밝자마자 시작된 공성전은 저물녘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훗날 ‘오스테라 혈전’이라고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자의 수는 양군 공히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전황을 살펴보고 공세를 멈출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공성차에 올랐던 파비트라의 어깨에 화살 한 대가 스치듯 꽂혔다.


이 일로 그날의 전투는 끝이 났다. 파비트라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워낙 많아 부상이 위중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오스테라 인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여제가 쇠약해진다면 이대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을까? 반대로 복수심을 부추겨 일말의 자비도 얻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전쟁은 며칠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파비트라의 상처는 회복되어 갔지만 그와 함께 지독한 두통이 생겨났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이 두통 때문에 낮에도 누워서 지내다시피 했고, 밤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그렇게 시달리다가 어느 새벽녘, 파비트라는 불쑥 혼자 깨어나 앉아 기묘한 광경을 보았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풍경 속에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틀림없이 자신이었다. 젊은 듯도 늙은 듯도 했다. 여러 사람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누구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자신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남은 사람들이 모두 몸을 돌려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 버렸다.


꿈이었을지도, 환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와 함께 떠오른 생각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파비트라는 그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이 밝자마자 류이진을 불렀다. 그리고 편지를 내밀었다. 류이진이 무엇이냐고 묻자, 파비트라는 유서, 라고 짧게 말했다.
물론 이런 편지가 황제의 정식 유서가 될 순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죽고 나면 읽어 달라는 뜻이리라. 류이진은 편지를 받들어 품에 넣고는 말했다.



“유서란 언제 써 두어도 무방한 물건입니다만, 아직껏 두통으로 죽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파비트라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말했다.



“생각해봐. 제국은 참 넓지. 여기서 황도까지는 얼마나 먼가? 남방은 또 얼마나 까마득하며 페레들의 고원은 또 얼마나 높던가? 경은 현명하니 묻고 싶어. 이 넓은 제국을 한 사람이 보살피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 한들, 과연 가장 좋은 방법일까?”



류이진은 이상한 기색을 깨닫고 ‘혹시 오스테라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으신 것인가’라고 물었다. 파비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전투로 함락은 코앞이었다. 물러설 싸움이 아니었다.



“짐이 승리하여 제국을 통일한들 그것이 영원할까? 고작 몇 세대나 그 모습 그대로일까? 이곳저곳으로 날아가려는 새들의 다리를 억지로 한 자리에 묶어 놓은 것이 제국은 아닐까? 경은 비파 항구를 오래 다스렸지. 경은 죽고 나면 비파 항구에 묻히고 싶나, 아니면 고향 베로에에 묻히고 싶나?”



류이진은 지체 없이 ‘베로에에 묻히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파비트라는 류이진을 동방의 군주로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비파 항구를 떠나 베로에로 돌아가도 좋다고 명했다. 류이진은 다소 놀랐으나 곧 감사의 예를 표했다.
류이진은 오래 전, 이스밀과 함께 비파 항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온 후로 한 번도 베로에에 돌아가지 못했다. 수십 년간 타향에 매여 의무를 다해 온 그를 드디어 놓아준 셈이었다.



“그만한 세월과, 정성과, 충성스러운 백성들도 경의 고향을 바꾸지는 못했구나. 짐은 죽으면 황도에 묻힐 테지. 그런데 만약 짐이 황제가 되지 않고 일개 황녀로 살아가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면,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을 준 곳에 묻히고 싶구나. 짐이 지금 부수고 있는, 곧 시체와 곡소리만이 남게 될 저곳에.”



류이진은 굳이 답변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여제가 몸이 불편하니 마음도 약해져서 감상적인 소리를 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류이진이 보기에 이 전쟁은 물러서서도 안 되고 물러설 필요도 없는 전쟁이었다.
빠른 승리만이 여제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리라. 수많은 전쟁에 지친 여제가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감상적이 되었다 해서 실망할 것까지는 없었다. 여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거의 이긴 거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본래 영리한 기회주의자였던 류이진은 파비트라를 만나 한 황제를 진심으로 섬기는 빼어난 신하로 거듭났다. 그러나 주군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배웠다 한들 타고난 본질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류이진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사랑하기보다 지략으로 다루는 자였다. 자기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이 다 죽은 뒤, 먼 미래의 세상까지 걱정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런 자였기에 류이진은 파비트라가 그날 깨달은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튿날, 파비트라는 후위에서 머무르고 두 장군의 지휘로 공성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결국 끝이 났다. 오스테라는 함락되었다.
여제의 군대는 노도처럼 오스테라 시내로 밀려들어갔다. 곧 약탈이 시작될 찰나, 나디르가 거느린 연의군이 그들을 막았다. 그러더니 오스테라를 완전히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불만을 품은 병사들과 연의군 사이에서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 비파 항구에서 온 군대의 지휘관들은 류이진에게 호소했다.


류이진은 본래 약탈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약탈이란 긴 전쟁에 지친 병사들의 보상심리를 채워줄 뿐, 실제로는 복구에 더 큰 비용이 들기 마련이었다. 아예 파괴할 생각이 아니라면 흉흉해진 민심을 되돌리기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스테라 정도로 가치 있는 항구를 아예 잿더미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류이진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왜 나디르가 나서서 약탈을 막았을까? 류이진이 머리로 병사들을 다스린다면 나디르는 병사들의 원초적인 욕구를 이끌어내고 충족시켜주는 부류의 지휘관이었다. 그런 그가 약탈을 막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불안정한 기류가 흐르는 오스테라로 여제가 행차했다. 파비트라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가마에 올라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시민들의 퀭한 얼굴과 멍한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집들은 되는대로 뜯어내어 방벽을 쌓느라 거의 다 파괴되어 있었다. 옛 번영은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다. 기나긴 농성이 이 도시의 피와 살을 모조리 뜯어먹은 듯했다.


며칠 뒤, 류이진은 새 총독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덜 마무리된 행정을 처리하기 위해 군대를 돌려 비파 항구로 돌아갔다. 비파 항구의 새 총독은 메레디스의 아들이자 오랫동안 류이진을 보좌했던 헤로달이 맡게 될 예정이었다. 헤로달은 몇 년 전, 류이진의 막내딸 제니리와 결혼해 류이진의 사위가 되었다.


파비트라가 요양하는 사이, 오스테라의 전후 처분은 나디르가 맡았다. 나디르는 시내의 약탈을 막았던 것과는 달리 오스테라의 지배 귀족을 모조리 없애버리려 들었다. 함락된 오스테라를 지배했던 가문들은 모두 붙잡혀 왔다. 원로원 의원들은 목이 매달리고 가족들은 노예가 되었다.
발니오는 도망쳐 거리에 숨어 있다가 수 일 만에 붙잡혀 왔다. 이미 넋을 놓은 듯한 그자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내내 아르카디오라는 자를 끊임없이 욕했다. 그가 자기를 구해주기로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오는 워낙 흔한 이름이어서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발니오의 목은 성벽 높이 매달렸다.


며칠 뒤, 몸이 나아진 파비트라는 오래 전에 이스밀과 함께 살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옛 집은 이미 사라졌지만 바닷가는 그대로 있었다. 파비트라는 수행원들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신발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마침 해질녘이었다. 발치를 스치는 바닷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따뜻했다. 파비트라는 맨발을 좋아했다. 맨발로 있을 때면 늘 이스밀이 떠올랐다. 발을 적시며 걷자니 이 모래밭을 웃으며 달리던 소녀와 그 뒤를 따라오던 젊은이가 어렴풋이 눈을 스쳤다.


파비트라가 차츰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자 수행원들이 걱정하며 뒤를 따랐다. 그때 바다 너머에서 들어온 쪽배 한 척에서 어부가 내리더니 여제에게 예를 표했다. 처음에는 누구인가 싶었지만, 문득 얼마 전 만났던 노부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기억이 났다. 그는 전장을 찾아왔던 노부인의 아들이었다. 옛날 함께 어울려 놀던 기억이 나 파비트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에게 작살 쓰는 법을 배웠지. 이 바닷가가 그대로인 것처럼 반갑구나.”



어부는 여제의 축복을 받으려는 것처럼 발치로 와 무릎을 꿇었다. 파비트라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어부가 숨기고 있던 단도가 파비트라의 배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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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자시커 @안탈론 | 50레벨 | 사제 | 하리하란
    1빠
    2015-02-25 10:07
  • 자시커 @안탈론 | 50레벨 | 사제 | 하리하란
    헐 근데 어부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르카디오가 손썼나본데여
    노부인을 죽였다거나..
    2015-02-25 10:14
  • 예마님 @에안나 | 55레벨 | 예언가 | 페레
    2015-02-25 11:29
  • 유설아 @레비아탄 | 21레벨 | 사제 | 하리하란
    아니누가 정답을 작살을 던졋다고 투표를햇어그래~?ㅋㅋㅋ 유서자나..
    2015-02-25 13:49
  • 명석몽 @안탈론 | 52레벨 | 유령 용사 | 페레
    덧없고 덧없도다.
    2015-02-25 14:01
  • 정또치15 @크라켄 | 0레벨 | 죽음의 초심자 | 누이안
    드럽게 재미없네 두줄읽고 눈배림
    2015-02-26 14:15
  • 파요파요 @진 | 55레벨 | 사제 | 페레
    ㄷㄷㄷㄷ 어부짜응..
    2015-02-26 16:12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마법 근위관 | 엘프
    뜬금 단도 ㅂㄷㅂㄷ
    2015-02-26 16:20
  • 리뱅 @키프로사 | 55레벨 | 첩자 | 하리하란
    작살 반타작 ㅅㅅ
    2015-02-27 10:18
  • 싱클레어 @크라켄 | 42레벨 | 그림자 악사 | 엘프
    브금이나 삽화정도를 넣어보면 어떨까요
    실제 책처럼 프레임을 만들어도 괜찮을거 같은데..
    2015-02-27 16:59
  • 바야드 @루키우스 | 16레벨 | 저승사자 | 하리하란
    뭐가 우째 돌아가누!!
    2015-09-18 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