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26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5-03-04 09:34 | 조회 10623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닷가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긴 순간이었다. 파비트라는 지평선 너머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자신을 껴안는 것을 느꼈다. 그가 속삭였다.



‘그대는 진정한 제국을 낳았지만, 이제 어머니로서 자식을 놓아줄 때가 되었소. 미래는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파비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부는 뒤이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수행원들이 달려왔을 때, 바닷가에는 지는 해가 흘린 피인 양 붉은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비파 항구로 떠났던 류이진은 급보를 듣고 황급히 오스테라로 달려왔다. 그러나 오스테라로 오자마자 당혹스러운 광경과 마주했다. 나디르가 스스로 오스테라 총독이 되어 있었고, 오스테라인 천여 명을 죽여 성벽에 매달아 놓았던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파비트라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것인데, 사실상 증거 따위는 없었다. 그저 분풀이였다.
심지어 나디르는 류이진에게 마치 왜 왔느냐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류이진은 주군을 잃은 황망함을 겨우 가누며 나디르가 오스테라의 총독이 되려면 새 황제 폐하의 임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디르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오스테라의 일은 나보다 잘 처리할 사람이 없소. 새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실 거요. 배신자들도 내가 모두 처단했소. 경이나 나나 모두 선황제 폐하를 충심으로 모셨지만, 선황제 폐하께서 경에게는 승하하시기 전에 베로에의 군주라는 포상을 내리지 않았소? 만약 저 참람한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오스테라는 내게 내리셨을 거요.”



나디르는 오스테라야말로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며, 그래서 자기가 이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류이진에게는 베로에와 더불어 그의 사위가 다스리게 될 비파 항구가 있지 않느냐고도 했다. 나디르의 태도가 너무 뻔뻔스러워서 천하의 달변가인 류이진조차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나디르는 파비트라가 류이진을 편애해 자신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며, 이스밀이 살아 있었더라면 류이진을 챙기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오스테라의 군주 자리를 주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흡사 뭔가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류이진은 나디르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렇더라도 이 정도의 변화는 예상하지 못했다. 파비트라의 생전에 나디르는 성질이 급하긴 해도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염치와 은혜를 아는 자였다. 그러나 파비트라가 죽고 나자 그런 것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류이진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오스테라는 이미 나디르가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와 다투어봤자 중재를 해줄 황제는 까마득히 먼 황도에 있었다. 류이진도 만일을 생각해 군대를 이끌고 오긴 했지만 빨리 와야 했기에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슬픔은 나중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오스테라와 탑의 도시를 모두 차지한 나디르가 새로운 독립 제국을 세우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류이진은 일단 황도로 가서 새 황제를 옹위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오스테라를 떠났다.


한편, 황도에서 황태자 이샤마는 어머니가 오스테라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꿈에서 본 무늬를 옮겨 그리고 있었다. 다 그린 뒤에는 창고에서 찾아낸 흑요석 ‘성스러운 자의 공양’ 위에 새겼다. 무늬는 매우 복잡했기에 꼬박 1년이나 걸린 작업이었다.



‘성스러운 자의 공양’이 완성된 날 밤, 하리하랄라야 왕궁에 급사가 당도했다. 급사는 파비트라 대여제가 오스테라를 정복했으나, 승하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파급이 클 수밖에 없는 이 소식은 제일 먼저 은밀하게 황태자에게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이샤마는 밤새 홀로 숙소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새벽녘, 시종에게 산책을 나가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후원으로 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이 되어 소식을 들은 메레디스는 즉각 황태자를 찾아갔다. 이샤마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큰 난관에 맞닥뜨렸음을 깨달았다. 여제가 승하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고, 이어 황태자까지 사라졌음이 알려진다면 황태자의 실종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씌워질 가능성이 컸다. 자칫하면 황태자를 모살하고 황도를 차지하려 했다는 누명을 쓸지도 모를 일이었다.


메레디스는 깊이 생각한 끝에 일단 황태자의 실종을 숨긴 채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여제의 승하 소식을 사흘간 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그 사이에 이샤마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흘이 흐르고도 이샤마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메레디스의 이 행동은 이후 엄청난 오해를 부르게 되었다.


그때 알키미는 남방의 군주로서 아므르타에 잠시 다녀오던 길이었다. 여제의 승하 소식을 들은 그는 분격하여 이성을 잃다시피 했다. 그는 오스테라가 있던 땅에 피와 재만을 남기리라고 맹세하며 즉시 오스테라로 기수를 돌렸다.
오스테라 근처에 다다른 알키미는 난민 행렬과 마주쳤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니 오스테라에서 왔다고 했다. 알키미는 참지 못하고 여제의 승하에 대해 자세한 정황을 물어보았다.



“나디르 장군이 오스테라를 차지하고 싶어서 오스테라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조리 죽였는데, 그 일로 원한을 품은 자가 황제 폐하를 암살한 것입니다. 지금 나디르 장군은 스스로 오스테라 총독 자리를 차지했고,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자들은 암살자와 연루됐다는 누명을 씌워 성문에 매달고 있답니다. 이대로라면 오스테라는 나디르 장군의 사유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알키미도 무척 놀랐다. 그 또한 나디르가 그 정도로 탐욕스럽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죽은 이스밀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혀 돌발 행동을 할 때는 있었지만, 이런 변화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난민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주장하니 믿지 않기도 어려웠다. 몇몇은 제 가족들도 이번 서슬에 죽어나갔다며 눈물을 흘렸다.
알키미는 일단 사실을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스테라로 나아갔다. 오스테라 성문에 즐비하게 매달린 시체들을 본 그는 정식으로 입성하는 대신 몇몇 병사들만 데리고 비밀리에 오스테라에 들어갔다. 그렇게 도시 안을 돌아다니며 여론을 살펴본 알키미는 얼마 안 가 자신이 들은 소문이 모두 사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황도 근처까지 간 류이진은 가문에서 보내 온 사자를 만나 이샤마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류이진은 파비트라가 남긴 유서를 읽으며 하루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후 연 가문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았다.
나밀을 비롯한 류이진의 자식들은 이미 전쟁을 벌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태자를 숨긴 역적을 찾고, 여제의 죽음에 복수하며, 나디르를 제압해 제국을 되살려야 했다. 그것에 여제의 뜻을 잇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류이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전 가문이 베로에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당황한 아들딸들에게 류이진이 말했다.



“선황제 폐하께서는 오늘 벌어질 혼란을 생전에 예상하고 계셨다. 그래서 내게 이미 유지를 남기셨다. 폐하께서 곁에 계시지 않은 지금에야 폐하께서 최후의 나날에 품었던 진정한 뜻을 깨닫는구나. 제국은 한 무리의 야생마였다. 폐하께서는 그 고삐를 한 손에 움켜쥐셨으나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될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 고삐를 쥘 분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인들 그런 일을 해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대제로 불려 마땅한 선황제여, 얼마나 많은 고난과 또 행운이 그분의 일생과 함께했던가?”



류이진은 파비트라가 준 유서를 자식들에게 돌려 읽게 한 뒤 촛불에 불살랐다. 다른 자들에게 제국의 분열에 대한 당위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비록 안 될 것을 알더라도 그분을 옹위하며 조각나려는 제국을 움켜쥐고자 발버둥 쳐야 했으리라. 그러나 고삐를 쥘 이는 떠났으니 제국이 갈라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몇 년 뒤.
사라진 이샤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나디르, 류이진, 메레디스, 알키미는 각각 저들의 고향 땅에서 여제의 유지를 잇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사이 오스테라는 숨을 죽인 채, 저들의 도시를 재건해나갔다.
사람들은 오스테라가 함락되기 전, 나디르의 머릿속에 오스테라를 갖고야 말겠다는 욕망을 불어넣어준 사람이 있었다고 전한다. 나디르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밀에 대한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합리적인 류이진이 고개를 저으며 떠날 수밖에 없게끔 나디르의 광기 어린 공포 정치를 부추긴 자도 있었다고 전한다.
달려온 알키미가 나디르의 변화를 믿을 수밖에 없게끔 조작한 자도 있었다고 전한다.


귀족조차 아닌 어부가 파비트라를 암살한 것은 뜻밖의 사태였고, 이샤마의 실종은 더더욱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은 오스테라의 부활을 도왔다. 그 후 제국이 넷으로 쪼개져 이슈바라 체제가 탄생한 것은 그자가 심은 씨앗이 발아한 결과였다.


그자는 일생 그늘에 있기를 좋아했으나 그자의 후손들은 대대로 오스테라의 낮과 밤을 모두 지배했으며, 오늘날 ‘오스테라의 칼리아이’라고 불리고 있다.


얼마 후, 정체를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카타니아 황녀의 사라진 두 아이를 찾으며 오스테라 근교를 돌아다녔다. 오랜 추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들을 찾지 못한 그들은 탄식하며 말했다.


샤미르 3세 폐하께서는 여덟이나 되는 황자, 황녀를 두셨으나, 오늘날 그 핏줄은 한 점도 남지 않고 제국 속에 녹아버렸노라고.











제국의 황태자에서 한 명의 방랑자로 변한 이샤마는 로카의 장기말들 속으로 들어갔다. 제국이 연기처럼 사라진 뒤에도 그의 삶을 수백 년 동안 계속되게 만들, ‘성스러운 자의 공양’을 가슴에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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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 권동우 @안탈론 | 52레벨 | 그림자 검 | 페레
    ... 이제 그럼 뭔 재미로 ㅠㅠ
    2015-03-04 10:19
  • 전효성 @키프로사 | 55레벨 | 감시원 | 누이안
    아빠도 자식버리더니 엄마도 자식버림
    2015-03-04 10:22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마법 근위관 | 엘프
    이게 다 아르카디오 때문입니다...?
    2015-03-04 10:44
  • 오후에도 @크라켄 | 55레벨 | 자객 | 하리하란
    하 파비트라여 파비트라여
    2015-03-04 16:34
  • 명석몽 @안탈론 | 53레벨 | 유령 용사 | 페레
    성스러운자의 공양을 잃어버렸지. 누가 가져갔을까?
    2015-03-04 17:24
  • 해밀님 @진 | 55레벨 | 흑마술사 | 하리하란
    아직 히스토리 다끝나지도않았는데 연재종료

    이봐요 xl님들하
    그래도 시작한 이야기는 막장스토리로라도 끝내주고 가셔야죠
    이게 뭐예요 나원 웃기지도않아서ㅋ
    2015-03-04 21:38
  • 계란한판 @안탈론 | 50레벨 | 첩자 | 하리하란
    헐..
    2015-03-05 01:33
  • 에브니 @크라켄 | 51레벨 | 추적자 | 엘프
    현재(게임시점)의 세력구도가 어떻게 완성됐고 오스테라가 동대에서 어떤 존재고 사라진 황태자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것인가(확장팩용?) 하는 궁금증까지 줬으니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군요.  뒤가 궁금하긴 하지만 뒷 이야기가 나오면 게임 미래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듯요.
    지금까지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네 장군의 후예들이 원대륙같은데 모여서 박터지게 싸우는 컨텐츠 나와도 재밌을듯 ㅋ
    2015-03-05 12:13
  • 조패 @에안나 | 55레벨 | 첩자 | 누이안
    신 종족은 언제풀릴려나..ㅠㅠ
    2015-03-05 19:59
  • Nighthawk @크라켄 | 55레벨 | 정신 파괴자 | 누이안
    다 죽었어여.
    2015-03-06 09:24
  • Setila @안탈론 | 51레벨 | 추적자 | 엘프
    작가님이 태양의 탑 쓰시려나 봅니다
    2015-03-06 22:59
  • 시온 @키프로사 | 13레벨 | 사제 | 누이안
    공양이 흑요석이였네
    2015-03-07 14:39
  • 루어매니아 @진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하리하랄라야 퀘스트를 다시 해봐야 할것같다
    2015-03-14 03:35
  • 바야드 @루키우스 | 16레벨 | 저승사자 | 하리하란
    으어 아쉽네요 ㅜ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ㅜ
    2015-09-18 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