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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민 희


마리아노플의 카페 거리에는 음산한 소문이 있다.
백여 년 전, 그곳의 한 카페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가 유령이 되어 떠돌며 구석진 곳에 장신구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본래 왕자비로 내정되었다가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되어 꿈이 좌절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납치가 아니라 사랑의 도피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리아노플 시민이라면 카페 거리에서 떨어진 장신구를 보면 모르는 체하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다.
카페가 붐비던 화창한 봄날, 솔즈리드의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의자 틈새에서 화려한 사파이어 귀걸이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간 소녀는 귀걸이를 꺼내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슬쩍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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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 륜 힐 데


“드디어 찾으셨군요. 감축드립니다.”
“흥분하지마라 아샤벨. 무려 2천년의 시간이었다. 막판에 이 계집의 육체와 영혼을 녹이는데 걸린 시간만도 100년 이었지. 교활한 알렉산데르가 Er씨족에 열쇠를 맡긴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혈통의 금제를 걸어서 누이안 쪽에 숨겨 왔다는 걸 확인하는데 너무 시간을 소비했어.”
검은 두건으로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형체를 가린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에오카드와 신의 방패들이 집요하게 방해를 한 탓에 그림자 매신의 채찍이 많이 상했지만, 그 분을 위해서라면 모조리 죽어버려도 상관없겠지요.”
“1주일 뒤에 직접 갈 것이다. 너는 나린과 아카네스파들을 모아서 신의 방패를 교란하거라.”
사이한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미소 짓는 작은 소녀의 뒤로, 더욱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검은 두건의 형체가 희미하게 사라졌다.


빛나는 해안 에아나드의 도서관 입구에 한 무리의 모험자들이 모여 있었다.
“근래 들어서 로카의 장기말들에 지진이 더욱 심해졌다던데?”
"이슬 평원의 전투도 희생이 큰 모양이야. 죽은 자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라 애초에 끝이 안보이니...게다가 이건 비밀인데...신의 채찍이 사실은 안탈론의 부하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누가 들을 새라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는 동료에게 듬직한 남페레가 발끈하면서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신의 채찍은 타양님이 이끄시던 페레의 자부심이라고!”
화가 난 동료 앞에서 더 이상
'신의 채찍의 참모습이 이슬 평원에 피의 전쟁을 유도해서 안탈론의 족쇄에 지속적으로 마법을 공급하는 역할이다'
라는 소문을 말할 수 없었던 하리하란의 눈에,
혼자서 무모하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작은 소녀가 보였다.
“꼬마야 그 안은 위험하단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렴.”
친절한 모험가의 말을 무시하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던 소녀가 중얼거렸다.
“건방진 누이 계집이 축복한 땅이라서 무사한 것을 하늘에 감사하거라...”


몇 시간 뒤, 도서관 3층의 비밀스러운 곳 입구에 소녀가 나타났다.
소녀는 품 속에서 (원래는 붉게 빛나야 하지만 혼탁한 보라색에 잠식당한) '찬란한 에아나드 마법사의 귀걸이'를 꺼내서 착용했다.
‘에아나드의 심장’ 출입마법석에 손을 올린 소녀는 점점 떨려오는 마법진의 증폭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렉산데르! 세상은 너를 최고의 마법사라 부르지만 이까짓 혈통의 금제로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너가 숨긴 심장수호자의 열쇠주인은 이미 영혼마저 타락하여 내 일부가 되었으니까...에아나드여! 어서 열쇠의 주인에게 심장의 문을 개방하거라!”
수 분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마법진이 산산조각나는 소리와 함께 에아나드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어쩔 수 없이 열쇠의 주인에게 치부를 드러냈으나 악의 화신을 인정할 수 없어 분노에 떠는 에아나드의 심장 수호자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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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동안 나의 아들을 잘도 감추어 두었구나. 오래간만의 유흥이니 나도 그림자 장난은 중단하고 최선을 다해주마.”
그 순간 작은 소녀라 생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마력이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들어 올리는 소녀의 양손에서 사악한 영혼의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슬 평원에서 신의 방패 연합군을 거세게 몰아치던 안탈론이 난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피투성이 군대들 또한 썰물처럼 물러갔다.
어리둥절해 하는 신의 방패들 사이로 안탈론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지금까지 나의 그림자와 노느라 수고가 많았다. 조만간 너희들의 마지막 여흥이 도래할 것이다'

평소와 다른 안탈론의 말에 불길함을 느끼는 병사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승리의 기쁨에 환호를 질렀다.
너무나도 오랜 전쟁, 셀 수 없이 스러져간 동료들...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의 과정이 아니라 승리했다는 결과 자체였다.


기동을 멈추고 싸늘해진 심장수호자의 가슴에서 푸른 구슬을 뽑아낸 소녀는 구석에서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수정구 쪽으로 다가갔다.
수정구 앞에 멈추어 선 소녀가 구슬을 쓰다듬자 놀랍게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프..로..사...'
그 소리를 들은 소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신이 되버린 ...아니 키리오스여...
2천년 동안 봉인되었다가 풀린 첫 마디가 애증의 대상인 키프로사라니 우습구나.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
2천년 간 내가 내린 결론은 이성을 지닌 파괴신으로는 진정한 라그나뢰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연인에게 배신당했다고 믿는 너 자신에게 절망하거라!
이성을 버리고 분노에 몸부림치거라!
이리되면 키프로사를 사칭했던 더러운 알렉산데르 놈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되겠군...크하하하”

소녀의 손을 떠난 푸른 구슬이 수정구 안으로 사라지자 도서관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잠시 뒤, 폭발적인 살기가 휘몰아치며 도서관 전체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키프로사 데이어!!!'
인간이었다가 신이 되어 버린 한 존재의 수 천 년에 걸친 원념에 도서관이 무녀져 내리고 있었다.



‘파괴신의 봉인은 풀렸다. 이제 다음은 나차쉬가르인가...그 분들을 알현할 시간이군’
수 천 년의 기억들이 소멸해가는 중심에서...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안탈론의 마지막 외침이 메아리쳤다.

"이 도서관의 모습이 너희들의 운명이다! 필멸자들이여 무너져가는 세상에 절망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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