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귀로
분류 : 책
작자 : 리델하트
생산 정보
소모 노동력 : 25
제작대 : 인쇄기
원고 획득 정보
획득경로 : 인양을 통해 카르페나움 교각의 난간기둥을 획득하면, 업적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귀로 원고 주는데, 책으로 제작하면 된다.
내용
#1
영원처럼 느껴지던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마침내 끝났다.
드워프의 일생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에 비해선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생과 사가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은 억겁과도 같은 긴 세월이다. 그 영원과도 같은 세월을 나는 마침내 이겨냈다.
만약, 이 시간의 상대성을 10년 전에 알았다면 나는 절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2
풍요의 신인 샤티곤이 현세에 강림해 약소국이었던 곤 왕국에 힘을 실어주면서 세상은 격류에 휩싸이게 되었다.
곤 왕국은 강성했던 페란을 물리치고 대륙 서부 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샤티곤은 자신이 지닌 풍요의 권능으로 황금을 만들어내 용병을 모집했다. 대륙의 중심인 델피나드를 공략한다는 터무니 없는 전쟁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가 제시하는 황금의 마력에 빠져 전쟁에 참여했다.
나 또한 어리석게도 황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샤티곤의 군대에 들어갔다.
#3
사인 가족이 오백 년 동안 놀고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을 군대에서 10년 동안만 복무하면 주겠다고 하니 별수 없었다.
페란의 속주에 불과했던 내 고향 카페르나움의 많은 드워프가 가족을 위해 샤티곤의 군대에 입대했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도 내 또래의 젊은 청년이 무려 예순 명이나 샤티곤의 군대에 입대했다.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쟁이란 것이 그렇게 끔찍한 것일 거라고는...
#4
카페르나움 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인 새벽녘 마을에서 예순 명의 드워프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샤티곤의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순 명이 함께 떠나왔던 이 길을 지금은 나 혼자 걷고 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10년 동안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 역시도 정상은 아니다.
왼쪽 팔이 잘려나간 외팔이가 되고 말았다.
#5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즐겁다.
바람에 나부끼는 왼쪽 소매가 허전하지만 그래도 즐겁다.
피튀기는 전쟁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비릿한 혈향과 시체 썩는 냄새를 품고 있어 늘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넓은 들판에서 불어오는 이 산들바람은 생기가 가득하다. 길을 가다 들판에서 산딸기를 발견했다.
상큼한 향기에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6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주머니에는 방금 채집한 딸기가 가득 들어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들판을 걷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딸기가 담긴 주머니를 등 뒤로 던진 후 칼을 뽑았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 생긴 습관이었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야생 야타였다.
놈은 내가 던진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딸기를 게걸스럽게 주워 먹었다.
젠장!
#7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소규모 상단과 마주쳤다.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들이 검과 도끼 따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용병들이 허리에 찬 무기를 꺼내서 내게 휘두르는 각도와 범위를 계산하면서 나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상단의 마차 뒤편에 활을 지닌 용병이 보였다. 나는 길가에 있는 바위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간 머릿속에서 궁수의 공격 범위를 피하면서 나머지 용병을 공격할 방법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소규모 상단의 용병들이 나를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8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소도시 제란트에 들렸다.
제란트의 경비병은 도시 입구에서 기다란 창을 든 채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경비병이 들고 있는 긴 창이 눈에 거슬렸다.
창끝의 날카로운 날이 햇볕에 반짝이는 게 보일 때마다 가슴이 움찔거렸다.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된 모습에 경비병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나는 그에게 제대증을 보여줬다.
#9
평화로운 도시에 왔는데도 병장기를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전쟁터를 떠올린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전쟁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점에 들어갔다. 시원한 맥주라도 마시면 몸이 좀 진정 될 것만 같았다.
아직 초저녁도 되지 않은 시간인데 주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좀 가슴이 진정 되는 느낌이었다.
#10
긴장이 풀리자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며칠 전에 나무꾼 헥터가 용병 놈의 칼에 찔려 죽었어."
"싸움이라도 난 건가?"
"아니, 헥터가 도끼로 땔감을 자르고 있는데, 술 취한 용병이 공격했다더군."
"그 용병놈은 왜 헥터를 공격한 거야?" "용병이 10년 동안 델피나드 전쟁에 참전했던 놈이라고 하더군. 술기운 때문인지 도끼를 든 헥터가 전쟁터의 적처럼 보였데."
"완전 정신병자 자식이군! 어디 용병놈들 무서워서 살겠어!"
"내일 그 용병놈을 처형한다니 가서 침이나 뱉어주고 오자고"
#10
등줄기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헥터라는 자를 살해한 용병의 일이 꼭 남 일 같지 않게 여겨졌다.
술에 취하면 나도 그와 같은 실수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 들린 맥주를 더는 마실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 왼팔을 잃었을 때 가장 생각났던 게 바로 시원한 맥주였다. 불구자가 됐다는 사실보다도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단 생각이 더 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맥주 맛이 쓰다.
#11
다음날, 도시의 중앙 광장에서 헥터를 살해한 용병에 대한 처형식이 열렸다.
단두대에서 목이 댕강 잘리는 용병의 모습을 바라보며 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처형당한 용병은 전장에서 아군으로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는 인간이었다. 10년 동안 피튀기는 전장에서 어렵게 어렵게 살아남았는데, 평화로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게 너무나도 허무하게만 여겨졌다.
처형당한 용병의 시신을 향해 사람들이 침을 뱉는 모습이 보였다.
#12
울적한 마음에 도시를 떠나려는데, 누군가가 군대를 모집한다는 격문을 읽는 것이 보였다.
샤티곤의 군대와 하제의 군대가 계속 전쟁을 벌이고, 에페리움의 군대가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데,
이 전쟁은 모두 지상에 현신한 신들이 일으킨 전쟁이며, 그들의 힘 때문에 대륙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들의 전쟁을 막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하게 되니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라는 격문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격문에 동감하며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3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
종말을 막기 위한 전쟁.
세상을 지키기 위한 전쟁.
어떤 수식어로 미화해도 전쟁은 결국 전쟁이다.
격문에 동감하며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은 과연 전쟁의 본질을 알고나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살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저들은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14
바람이 불 때마다 왼쪽 소매가 나부낀다.
비가 내리면 3년 전 델피나드 외곽 전투 때 당했던 등허리의 상처가 쑤셔온다.
고향 카페르나움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예순 명이 카페르나움에서 델피나드로 떠날 때는 참 짧았던 길인데,
홀로 걷는 귀로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