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의 살아 있는 전설


로카의 살아 있는 전설

*제목 : 로카의 살아 있는 전설 *
분류 :
작자 : 미상

내용

#1

페레는 무엇으로 사는가?
평생의 벗인 눈사자를 타고 드넓은 대초원을 달리는 것만이 페레의 삶인가?
우리는 정체 되는 것을 싫어한다. 변화를 거부하며 제 자리에만 머무는 삶처럼 지루한 인생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늘 변화하는 대자연에 온몸을 부대끼며 정착하지 않은 채 초원을 떠돈다.
나 역시도 정체되는 것을 거부하는 페레이다.
그런 내가 지금은 긴 세월 동안 정체된 채 화석처럼 변해버렸다.
만용의 대가인 것일까?

#2

페레의 삶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많은 페레가 성년이 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근사한 눈사자를 얻기 위해 도전하며,
대초원의 자연에 도전하여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때론, 이웃 부족이나 이종족의 침략에 응전하며 대초원의 의지를 지켜왔다.
언제부턴가 그런 우리 페레에게 로칼로카 산맥의 지배자이자 전지전능한 신인 로카가 한 가지 시험을 내렸다.

#3

어떤 페레도 로카의 딸을 본 적이 없다.
로카의 딸이 엄청난 미녀인지, 아니면 지독한 추녀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좋아하는 많은 페레가 로카의 시험에 응했다.
첫 번째 시험은 맨손으로 로카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높은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높이 솟아오른 로카산의 정상을 맨손으로 정복하는 일은 어지간한 담력과 의지력을 가진 페레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젊은이가 이 첫 번째 시험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했다.
매우 위험한 시험이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로카가 신의 권능으로 시험에 응한 이들의 목숨만은 보호해 줬기 때문이다.

#4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자는 두 번째 시험에 응할 수 있다.
로카의 두 번째 시험은 거친 물살로 유명한 로카 강의 협곡을 나무로 만든 술통만으로 무사히 떠내려가는 것이다.
거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바위에 충돌해 술통이 산산조각 나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위험한 시험이었다.
로카는 이 두 번째 시험에서 목숨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담력과 운을 살폈다.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여러 젊은이가 이 두 번째 시험에서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로카의 보호로 사상자는 없었지만, 협곡의 거친 물살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견디는 이가 드물었다.

#5

로카의 마지막 시험은 바로 로카와 장기를 둬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도전자는 앞선 시험에서 탈락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단 세 명의 페레가 로카의 세 번째 시험에 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뛰어난 장기 실력을 지닌 로카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세 페레는 대초원의 여러 부족 사이에서 뛰어난 영웅으로 회자 되었으며, 명성에 걸맞은 뛰어난 무용과 지도력을 선보였다.
세 영웅을 칭송하는 많은 젊은 페레가 성년이 된 후, 로카의 시험에 도전했다.
로카의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우리 페레의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 역시도 전통에 따라 시험에 도전했다.
그때 나는 로카의 시험이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6

나는 제법 잘난 페레였다.
부족의 어여쁜 처녀들이 모두 나를 짝으로 맞이하고 싶어 할 정도로 용맹함을 자랑하는 뛰어난 전사였다.
로카의 시험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으나, 나는 당당하게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세 번째 시험에 도전하게 됐다.
로카는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로카산의 커다란 돌기둥을 장기말로 사용했다.
장기가 계속될수록 로카산 아래의 구릉지에 커다란 장기말들이 치솟아 올랐다.
그 위용에 절로 가슴이 위축되었으나,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신에게 맞섰다.
신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7

로카의 세 번째 시험을 먼저 치렀던 세 영웅에 의해 우리 페레 부족에게는 장기놀이가 널리 퍼진 상태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족의 어른들과 장기 시합을 벌였다. 처음에는 실력이 몹시 서툴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부족에서 더는 내 상대가 될 수 있는 페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초원을 떠돌며 다른 부족들을 찾아다니며 장기 시합을 벌였다. 그러면서 내 장기 실력은 대초원에서 첫 손으로 꼽힌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런 내 장기 실력은 지엄한 광휘를 내뿜는 로카조차도 당해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장기 수가 거듭 될수록 로카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그리고 끝내 그는 외통수에 걸리게 됐다.
로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왕이 잡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 상황을 만들었다.
로카가 마지막 한 수만 쓰면 장기 시합은 내 승리로 끝나는 것이었다.

#8

패배로 직결되는 마지막 수를 둘 차례에 몰린 로카는 침묵했다.
전지전능한 신이라 하더라도 공평한 규칙이 있는 장기판에서는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단 한 수만 두면 내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나와 장기를 뒀던 페레들은 이 정도 상황에 이르면 마지막 수를 움직이기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로카의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로카의 딸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여자일까?
'신의 자식이니 눈부실 만큼의 아리따운 자태를 지닌 미녀겠지.'
'혹시라도 추녀면 어떡하지?'
로카의 딸을 생각하며 나는 그의 마지막 수를 기다렸다.

#9

며칠 밤과 낮이 지나는 시간 동안 장기말을 바라보며 장고를 거듭하던 로카가 입을 열었다.
장기를 두는데 시간 제한 규칙 같은 건 없다. 하늘의 정기를 맞으며 역전의 묘수를 생각하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라!
그리곤 신기루처럼 로카의 모습이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어차피 회생의 묘수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데 승리에 집착하는 로카의 행동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전지전능한 신이 젊은 페레에게 패배를 인정하자니 너무나도 굴욕적여 잠시 머리를 식히려 한다고 여겼다.
나는 기다렸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그들을 몰아냈다.

#10

로카는 오지 않았다.
로카의 권능 때문인지 나는 그와 장기를 두던 남쪽 신하의 기둥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나는 세월을 피해갔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으나 육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이 괴로워 자살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죽음조차 나를 피해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긴 세월 동안 로카를 기다리며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승리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며, 로카는 패배했지만 패배하지 않았다.

#11

로카는 아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영원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를 알던 모든 이가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나보다 앞서 로카의 시험에 도전했던 세 영웅의 존재도 잊혔다.
내 존재도 잊혔다.
그런데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로카의 시험에 응하는 젊은 페레들이 보인다.
나를 로카의 시험으로 이끌었던 전통이 세월이 지났음에도 변치 않고 계속 유지된 것이다.
빌어먹을 전통...

#12

로카의 시험은 축제로 변했다.
이제 페레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마저도 웃고 즐기며 로카의 시험에 도전하고 있다.
로카와 내가 장기를 뒀던 장기판이 '로카의 장기말들'이라 불리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늘 변화를 갈망했던 젊은 페레는 변화하지 못한 채 화석이 되어 가고 있다.
빌어먹을 로카!
이럴 거면 왜 시험을 열어서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한 것인가?
아마도 로카는 자신의 딸을 지독하게 미워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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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자 : 개복치 @루키우스 | 55레벨 | 그림자 검 | 엘프 (201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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