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성의 기적

모래성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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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1월 밤의 이야기 축제가을 축제 기념주화로 교환할 수 있는 중 하나.
푸른 소금 축제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내용

#1

나는 원래 긍정적인 누이안이었다.
괴로운 일을 겪더라도, 그 어려움 뒤에 힘들었던 만큼 더 큰 행복이 찾아오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 내 믿음은 눈보라 곰의 발에 밟힌 오이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악마 전쟁.
이 끔찍한 전쟁이 모든 걸 파괴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고향과
내가 사랑했던 가족과
나와 함께 했던 이웃과
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밤을 지새웠던 친구들까지.
모든 것이 이 전쟁으로 사라졌다.

#2

시차일드 백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이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즈나의 강력한 군대가 금세 변방의 반란을 진압하게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즈나의 주민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시차일드 백작의 반란에 두려움을 느끼며 피난을 고민하는 누이안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랜 평화가 전쟁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이즈나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3

끔찍한 비극이 발생한 그 날, 이즈나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나는 평소처럼 시장에서 약재를 팔기 위해 집을 나섰고,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 제니아는 그런 나를 대문 앞에서 배웅했다.
평소처럼 손을 흔드는 아내와 제시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손을 흔들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제니아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케이크라도 사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딸기 케이크를 들고 집에 돌아가면, 여섯 살의 귀여운 제니아는 쪼르르 달려와 내 목에 안기면서 말할 것이다.
"아빠 사랑해요!"

#4

제과점을 운영하는 마케우스에게 집에 돌아갈 때 가지고 갈 특제 딸기 케이크를 맛있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일전에 정력에 좋은 약재인 장뇌삼을 저렴한 가격에 구해준 일이 고마웠는지, 마케우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장사가 잘 됐다.
초승달 왕좌에서 찾아온 상단에서 값비싼 약재인 동충하초를 대량으로 구입해갔으며,
그들이 내게 판매한 로즈마리를 몇 시간 뒤에 찾아온 마리아노플의 노르예트 가문에 비싼 값에 되팔게 됐다.
시장에서 약재가 대량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드문데, 신기하게도 그날따라 대량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내심 '참 운수 좋은 날이로구나!'라고 생각했다.

#5

마케우스가 만든 특제 딸기 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제니아가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달려와 짧은 두 팔로 목에 매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내성 쪽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검은 연기가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지?
깜짝 놀라 집을 향해 달려갔다.
내성 안쪽에 자리한 주택가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여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
길 곳곳에 죽은 누이안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덩치 큰 괴물이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있었다.

#6

아내와 딸이 함께 평화로운 모습으로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집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 케이크를 땅에 떨어뜨린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타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집 천장이 무너져 내려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이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하찮게 여겨졌다.
그때 누군가가 내 몸을 잡아챘다.
"이대로 있으면 죽네!"
이웃사촌인 마리우스였다.

#7

"많은 누이안이 하수도를 통해 이즈나를 빠져나갔어. 자네 가족도 하수도로 빠져나갔을지 모르니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하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아내와 딸이 이미 하수도를 통해 이즈나 밖으로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마리우스와 함께 미로처럼 복잡한 하수도를 통해 이즈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긴 피난민 행렬이 마리아노플과 황금 평원 쪽으로 이어졌다.
아내의 친척 중 한 명이 긴 모래톱에 살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황금 평원으로 가는 피난민 행렬에 몸을 맡겼다.

#8

내가 하수도를 통해 탈출한 날, 이즈나는 불타버렸다.
시차일드 백작이 불러낸 워본이라 부르는 괴물이 이즈나 왕실의 국왕인 티베리온 3세와 수많은 시민을 학살했다.
워본의 대학살 속에서 이즈나를 탈출한 누이안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음 한편에서 불에 타 무너져 내리던 집 안에 아내와 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지는 긴 피난 행렬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계속됐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입을 여는 순간 '희망'이라는 이름의 작은 불꽃이 사그라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을 피난민 모두가 느끼는 것 같았다.

#9

황금 평원의 해오름 마을에 도착하자, 맨몸으로 이즈나를 탈출한 피난민들이 푸른 소금 상단의 상인들이 나눠주는 빵을 받아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 소금 상단에서는 위어드윈드 가문이 이즈나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있다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했다.
그들은 황금 평원 역시 이즈나에서 학살을 일으킨 괴물들과 싸우는 전쟁터가 될 수 있다며, 해오름 마을 남쪽에 정박한 범선에 피난민을 태워서 긴 모래톱으로 이동시켰다.
푸른 소금 상단의 상인들이 나서준 덕분에 긴 모래톱에 커다란 피난민 마을이 만들어졌다.

#10

피난민 마을에 도착한 누이안들은 애타는 모습으로 가족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피난민 마을이 막 생겼을 때는 몇몇이 가족을 되찾아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찾는 누이안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즈나에서 벌어진 대학살 소식이 점점 자세히 알려지면서 피난민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던 '희망'이라는 이름의 불꽃은 폭풍을 만난 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즈나 대학살이 벌어지고 육 개월이 지나자, 피난민 마을에서 더는 가족의 이름을 부르짖는 누이안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나 역시도 더는 가족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지 않았다.
그저 누이 여신의 곁으로 가지 못해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11

긴 모래톱의 하얀 백사장에 멍하니 쭈그리고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마리우스처럼 저 바닷속으로 그냥 뛰어들어 버릴까?'
이즈나에서 내 목숨을 구해줬던 마리우스는 며칠 전에 가족이 모두 워본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자의 증언을 들은 후, 영혼의 불꽃이 꺼져버린 듯한 눈동자로 멍하니 있다가 바닷속에 뛰어들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나도 마리우스처럼 바닷속에 뛰어들어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면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빌어먹을! 이 거지 같은 인생을 더 살아서 뭐하나...

#12

바닷속에 뛰어들려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을 때,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만들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저 아이는 어제도 그제도 계속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만들고 있었다.
모래성을 만드는 아이의 모습은 몹시 진지했다.
물놀이를 즐기며 재미로 모래성을 만드는 아이의 눈빛이 아닌, 간절함이 가득한 진지한 얼굴로 모래성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그렇게 계속 모래성을 만드는 거니?"

#13

모래성을 만드는 아이의 이름은 람파스였다.
람파스는 자신이 모래성 만드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긴 모래톱의 피난민 마을에 모래성을 만드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가족들이 자신을 찾아오게 될 거란 생각에 모래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가 지나면 바람에 무너지고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성이었지만, 람파스는 매일 새로운 모래성을 만들었다.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람파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준 후, 아이의 옆에서 함께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14

람파스와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누이안들이 다가와 모래성을 만드는 까닭을 물어왔다.
나는 람파스의 사연을 그들에게 들려줬다. 그러자 그들 역시 나처럼 람파스와 함께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과 파도가 사람들이 만든 모래성을 부숴버렸지만, 피난민 마을의 사람들이 매일 수백 개의 모래성을 만들었다.
이 기괴한 모습이 알려지자 람파스의 부모가 아이의 바람대로 피난민 마을에 찾아왔다.
마리아노플에 있는 피난민 마을에서 람파스를 애타게 찾던 부모는 긴 모래톱의 피난민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래성 쌓는 아이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모래성이 기적을 부른 것이다.

#15

람파스가 부모를 찾은 뒤에도 피난민들은 계속해서 모래성을 만들었다.
모래성을 쌓는다고 람파스가 가족을 찾은 것처럼 나도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매일 모래성을 만들었다.
위어드윈드 가문의 군대를 비롯한 마리아노플의 군대가 워본을 상대로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그래도 나는 모래성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모래성 쌓는 일을 멈추면, 작은 희망마저도 산산이 조각나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다른 누이안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 지도 모른다.

#16

얼마나 모래성을 쌓았을까?
드디어 낭보가 들려왔다.
마리아노플로 피신한 이즈나 왕가의 손녀 테오도라 1세가 막대한 거금을 담보로 드워프와 동맹을 맺고 대규모 기습 작전을 펼쳤는데, 처음으로 전투에서 워본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즈나를 점령했던 워본을 몰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즈나를 향하는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17

이즈나로 돌아온 나는 불타버린 집으로 돌아갔다.
검은 재와 불타고 남은 집의 기둥이 앙상하게 남은 자리에서 나는 어른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과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견했다.
어른으로 보이는 유골의 손가락에는 내 손에 있는 것과 똑같은 반지가 불에 그을린 모습으로 끼워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불타버린 이즈나 곳곳에서 서글픈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18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불타버린 집터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하지?
가족은 모두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 버렸고, 집은 불타버렸는데...
그때 이웃인 마리우스의 집이 있던 자리에서 작은 체구의 아이가 흐느껴 우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 보니, 아이는 마리우스의 아들 가이우스였다.
흐느껴 우는 가이우스의 모습에서 모래성을 쌓던 람파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람파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흐느껴 울고 있는 가이우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19

불타버린 이즈나에 다시 집을 짖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거친 바람과 파도에 무너진 모래성을 다시 쌓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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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자 : 블랑 @노아르타 | 55레벨 | 검은 기사 | 페레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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